흔들릴 때마다 한 잔 - 박양호 ----- 차 례 ----- <작가 소개> 1. 祝祭의 마지막 날 2 .저 높은 곳을 향하여 3. 욕망의 뜨락 4. 공주와 경비대장 5. 갈대가 되고 싶은 나무 6. 제비들의 소꿉놀이 7. 커튼 속의 不安 8. 패널틱 킥을 맞이하는 골키퍼 9. 이대로 돌이 되자 작가 소개 박양호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현대문학'의 추천 완료로 문단에 데뷔했다. 지금은 전남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각과, 현실 인식에 대한 진지한 노력들이 박양호 문학의 대표적 경향이다. 작품으로는 창작집 <지방대학의 교수>와 <슬픈 새들의 사회>, 장편소설 <서울 홍길동전> <흔들릴 때마다 한 잔> <우리들의 하늘> 등이 있다. 1991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다. 1. 祝祭의 마지막 날 가을. 축제. 그리고 대학교, 대학교...... 골목길에 빨갛고 파란 플래카드들이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개교기념축제, 학술발표회, 음악회, 미술전시회...... 그런 플래카드들이 빨래처럼 줄줄이 널린 그 길에는 성장한 남녀 대학생들이 무리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들이었다. 무릎이 툭 불거져 나온 교련복을 아무렇게나 입고, 검은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운동화를 직직 끌며 막걸리집에서 국가와 사회 또는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우는 친구를 큰 소리로 달래던 그런 평범한 남학생들처럼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라면보통을 두 개나 먹을 수 있는 거금을 지불하고 구두들을 반짝이게 닦아 신고 의젓하게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런 남학생들 옆에는 예외없이 울긋불긋한 한복을 입은 여대생들이 세무 핸드백 대신 빨간 복주머니를 손가락에 걸고 한들거리며 따라붙고 있었다. 그렇게 한복으로 성장한 여대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엉덩이 툭 불거져 나온 청바지 입고 책 몇권 끈으로 묶어서 어깨너머로 걸치고 다니며 솜사탕이나 튀김을 아무데서나 아귀아귀 먹어치우던 평소의 그런 여대생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강민우(姜民雨) 사범은 창문을 닫았다. 도장(道場) 이층에서 그런 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까 세상에 밑천이라곤 굳은살 잔뜩 박힌 주먹과 이단 옆차기밖에 없는 자신의 신세가 자꾸 서글퍼졌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무얼한다...... 근처에서 하숙하는 대학생들이 대부분인 저녁 성인반은 벌써 며칠째 운동이 되지 않고 있었다. 모두 축제에 정신이 팔려 돌아가는 관계로 하루 결석에 기본형 되풀이 스무 번이라는 벌칙도 아울러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아침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유치반 아이들이 썰물처럼 밀려나간 강사범의 태권도 도장 <청룡관> 마룻바닥에는 오후의 미지근한 햇살이 몇 줄기 밀려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강형, 거 제발 이 도장 이름 좀 바꾸슈, 청룡관이 뭐요, 청룡관이. 우리 하숙집 아주머니는 내가 청룡관에 가니까 친구들이 찾아오면 그렇게 말해줘요 하면, 아니 학생은 금방 저녁 한 그릇 뚝딱 해치고 나서 또 짜장면 먹으러 가는 거야? 글쎄 그런다니까요. 짱괘집 이름 모양 청룡관이 뭐유. 왜 근사한 이름들 많잖아. 이소룡 도장이라든가, 기막힌 도장, 주제파악도장, 삼십육계도장, 뭐 그런 걸로 바꿀 생각 없수?] <백곰>대학 경영계열 1학년 학생인 성인반의 서대동(徐大同)이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런 소릴 해올 때 강사범은 슬슬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기마자세를 취하라고 하면 언제나 치질걸린 놈 빠다맞듯 궁둥이를 오리처럼 있는 대로 뒤로 빼는 친구였다. "어, 강형!" 호랑이 제말하면 온다더니...... "뭘 혼자 중얼대슈?" "아냐 날씨가 꼭 가을 같다구 했어." "그야 시월이니까. 아이구, 강형, 이거 농담할 새 없수다. 어서 가다마이 입구 새끼줄 매슈!" "왜 또? 닭집에 보리소주 푸러 가자구?" "글쎄 결국엔 그렇게 노노예스가 될 거지만 좌우간에 사설빼구 어서 옷 입으시라구요." "피보기 미팅에 가자는 거 아냐?" "허허. 나중에 자세자세 설명할 테니까 어서 나가자구요." 강사범은 결국 서대동을 따라 나서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대학가 축제니 뭐니해서 들먹이는 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차에, 어디론가 멀리멀리 가고 싶었던 시간에 잘됐다 싶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데?" "아 글쎄 오늘이 우리대학 축제 마지막 날 아뉴? 그러니까 블루스나 고고를 추는 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순모 둘을 가봉까지 해 뒀는데 친구 한 놈이 즈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나 죽었다나 해서 못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쩌겠수. 멀리서 오시는 손님들인데 우리 대학의 명예와 체면, 우리 총장님의 틀을 생각해서라두 어떻게 그냥 보낼 수가 있느냐 그런 말입니다. 강형 껀수 올리게 해주느라고 그러는지 오늘 따라 얼굴 아는 놈들 치구 파트너 없다는 애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어쩌겠수? 형이 좀 봐 줘야지......" "어디까지 봐주면 되는 거지?" "파티장에 입장할 때까지만 동행합시다. 그 다음에야 깜깜해서 서로 얼굴 알아 보기도 힘들 테니까요." "어떤 애들인데?" "강형, 한마디로 왔다예요. 순모에다가 올리비아핫세예요. 아주 기똥찬 육칠팔들이라구요." "육칠팔이라니?" "육체파라 그런 말입니다. 나올 데 콱콱 잘 나오구, 들어갈 데 쏙쏙 잘 들어가구 뚫릴 데 잘 뚫렸다구요." "미리 수색작전에서 진도 다 나간 거 인계하는 거 아냐?" "아하,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백견이 불여일식이라. 백 번 듣는 게 한 번 보는 것만 못하고, 백 번 보는 것이 한 번 드시는 것만 같지 아니하다 했으니 갑시다." 주다야싸(주간다방 야간싸롱) <숲속의 공터> 안에는 구름과자(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평소에는 그저 코피나 시켜 놓고 썰(거짓말)이나 풀던 아이들이 과연 축제 때라 세긴 세구나였다. 모두 맥주 두세 병씩을 시켜 놓고 다정히 속닥 플레이들을 하고 있었다. "강형, 우리가 정시 도착한 모양입니다." 이제 막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 한복차림의 두여자 쪽으로 가며 서대동이 말했다. "우리가 좀 늦었군요. 자자, 미안합니다. 우리 모두 앉읍시다......" "어떻게 된 거예요?" 강사범이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얼굴이 깨끗하게 생기고 아랫입술이 유난히 예쁘게 튀어나온 여자가 강사범을 쳐다보며 물었다. "삔치히타요, 자 강형 인사하슈!" "삔치히타라니요?" "거 왜 있잖아요. 야구에서 일루, 이루, 삼루, 꽉 런너가 맥혀 있는데 타순은 하위타순이지, 투아웃이지, 저쪽 투수는 강속구 던지는 놈으로 새로 갈았지, 결승전 오회말에 삼대 빵이지, 그런 공공칠 위기 일발시에 느긋하게 약한 빠따 대신으로 나오는 선수, 태권도 육단으로 재직중인 강민우씨입니다. 이쪽은 상미양이구요." 서대동의 너스레를 받아, "강민웁니다." 강사범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어머 태권도가 여섯 개씩이나 되세요?" "여섯 개라니. 육단이요 육단......" "그럼 육당 최남선 선생하구......" 얼굴이 좀 둥글둥글하게 생긴 또 한 처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뭐냐. 육당 최남선하구 우리 할아버지하구는 육당 최남선 선생이 동경유학을 하실 때 같이 공부한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사촌동생 되시는 분의 외숙님하구 이 강형의 할아버지하구 같이 하숙한 사람의 딸과 결혼해서......" "그만하세요, 알렉스 헤일리라도 머리 헛갈리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치 이 여자애는...... 가을 코스모스 같군...... 그러나 저러나 도장 문을 그냥 잠가놓고 왔는데 괜찮을까...... 도둑이 들어 와서 역기짝이라도 들어가면 윤(尹) 사장이 쌩육이오를 칠 텐데...... 그러나 이애는 참 하늘하늘 하구나. 하늘을 우러러 한점 티없는 아가씨--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상미(常美)라고 그랬던가. 이 아이 이름이...... "아닙니다." "그럼 우리 그만 징치고 막 내릴까요?" "무슨 그런 험악한 말씀을?" "그렇다면 얼굴을 피세요. 제가 오늘 하루 당신의 미제 대리미가 될 데니까요." "야, 이거 이팀 끝내 주는구먼, 자, 그럼 우리도 진도 나가십다." 맥주 두 병에 젖은 안주 하나를 다 비웠을 때, 연분홍빛으로 물든 빨간 귓볼을 보이며 상미가 문득 물었다. "참 무슨 과세요?" 순간 강사범은 가슴이 저르르 저려왔다. 무슨 과라니...... --전 친구들이 예비고사를 보던 날도 월급사범으로 변두리 도장에서 목쉰 소리로 구령을 붙이고 있었답니다. 그때의 도장 사장은 서울시내에 태권도장을 열 개나 가지고 있는 고리대금업자였어요. 아시겠소? 등록금 엄두가 안나서 예비고사치는 날 울고 있는 나를 보고 그 노랭이가 뭐랬는지 아시오? 성인반이 다섯 클라스만 되면 대학엘 보내준다고 했어요.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치 변소에 우물대는 구데기가 호랑나비가 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전 바로 군대에 다녀 왔을 뿐 대학이라곤-- "아, 제가 대신 설명하죠. 이 강형은 일학년 다니다가 군대 갔다 와서 지금 법과대학 이학년이죠. 법학과예요......" "그럼 고시 고시공부 해야겠네요?" "아닙니다. 전 고시보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답게 사는 게 문제일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법이란 무엇일까, 그런 걸 주로 연구하죠......" "아주 왕세련됐군요." 동글동글한 서대동의 짝이 그렇게 말했다. 상미가 눈을 반짝이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법학과 이학년 강민우......"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축포가 펑펑 터지고 있었다. 진한 어둠의 밤하늘 가득히 올라간 폭죽이 때로는 희고 조그만 낙하산을 깨물고 내려 오다가 다시 펑펑 터지기도 하고, 실국화처럼 아름다운 꽃무늬를 허공에 피워 올리기도 했다. 대학생들의 장기자랑이 끝나고, 또 가수, 코미디언 초청 순서가 끝나고, 폭죽과 박수, 그리고 이제 백곰 대학의 그룹 사운드 <짚세기 6인조>가 나와서 ABBA의 주법으로 또 좀 어렵게 를 꽝꽝거리고 있었다. 조금 조용하게 블루스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추실까요?" 민우가 말했다. "전 손이 너무 미워요......" 상미가 두 손을 얼른 치마폭에 감추며 말했다. "그래두......" 강사범이 치마폭에 가려진 상미의 손이 어디쯤 있는가를 가늠하려 할 때 갑자기 운동장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뭘까? "야, 우리도 좀 들어가자구." "나도 이 대학 중퇴했어." "뭐야 뭐." "이거 이러면 그냥 끝나는 거야." 운동장 입구, 그러니까 축제 티켓을 받고 있는 곳에서 갑자기 밀고 당기는 수라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티켓을 구하지 못한 타 대학 학생들과 호국단 간부들 사이에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하는 문제로 시비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경비문제로 나와 있던 학생과 직원들이 달려가고 호각소리가 빽빽 울렸다. 그 와중에서 강사범은 얼핏 그 동네 종점 왕초인 <맨손>이 왕왕거리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상미씨, 저쪽 스탠드에 올라가서 잠깐 기다리세요." 강사범은 그렇게 일러 놓고 입구 쪽으로 뛰었다. 그러나 음악은 계속되고 있었고, 고고와 블루스가 번갈아 연주되고 있었다. 소란은 그러니까 그 넓은 운동장 입구에서만 국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봐 맨손!" 강사범이 우렁찬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왕년의 군대시절에 4천 명 훈령생 대표로 신고를 하던 강사범의 우렁찬 소리에 이러구저러구 말싸움을 벌이던 호국단 간부, 학생과 직원 본서 김형사, 기타 등등이 조용해졌다. "어, 강사범 웬일이야?" 맨손은 술이 잔뜩 취해 있었다. 맨손이라는 별명과는 달리 그는 언제나 양말목 속에다 커다란 독일제 면도칼을 꽂고 다니는 친구였다. 괜히 섣불리 건드리면 일없이 몇 사람 다치게 될는지도 모른다. 전과가 네 개나 붙은 친구니까, 형사쯤은 뭐 나부랑이로 알고 제 기분대로 하는 놈이었다. "요구가 뭐야?" 강사범이 천천히 넥타이를 풀며 물었다. 이미 강사범의 발은 양 옆으로 적당히 벌어져 있었다. 언제라도 허공을 차고 올라갈 자세였다. 다행이 <맨손> 그자는 혼자였다. 언제나 옆에 붙어 다니던 <악발이> <구두> <칠면조> 등등의 부하들은 어쩌고 혼자 여기까지 올라와서 설치고 있는 걸까. "구경 좀 하자는데 이 짜식들이......" 술이 취한 채 몸을 휘청거리면서 맨손은 재빠르게 양말목 속에 숨겨 두었던 면도칼을 꺼내 들었다. 살기! 잘 갈아진 칼이었다. 머리칼을 한 올 뽑아서 그 날 위에 얹어 놓고 후하고 불면 약한 입술 바람에도 머리칼이 싹둑 잘라진다는 그 칼. "좌우를 살펴 보는 게 좋을 걸!" 강사범이 조용히 말했다. 운동장가에 임시로 가설해 놓은 스포트라이트의 강한 불빛에 과도만한 면도칼이 번뜩이고 있었다. 허나 <맨손>도 바보는 아니었다. 허약한 학생 간부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주먹깨나 쓰는 체육과 학생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더우기 학교의 큰 행사라 본서의 김형사를 비롯하여 <찡>?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 있을 테니까. "허허! 강사범, 내가 오늘 면도를 안하고 와서 말이요. 슬슬 하차해서 큰못시장에나 가야겠시다......" "잘 생각했수......" 맨손은 칼을 접어 다시 양말 속에다 꽂더니 마치 가볍게 당구 한 게임 치고 나온 사람모양 휘파람을 불며 스적스적 되돌아 내려가고 있었다. 강사범은 조금 굽은 듯한 맨손의 등허리를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했어, 강사범......" 어깨를 툭 치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쳐다보니 본서 김형사였다. "웬걸요......" "왜 여기까지 왔을까. 학교 안에는 들어오지 않았었잖아?" 세모진 눈으로 강사범을 쳐다보며 김형사가 물었다. "다음부터는 미리 쥐약을 좀 쳐달라는 경고겠죠......" "그럴까?" "그리구 심란하니까 그랬겠죠......" --이자는 모를꺼야...... 대학 체육과 출신이라니까, 대학 근처에서 어슬렁어슬렁 대학덕으로 먹고 살면서도 축제에 참석할 수 없는 젊은이들이 느끼는 그 진한 슬픔을 알까? 동네아이들의 말타기 놀이에 끼지 못하고 저만큼 느티나무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하는 다리병신 아이의 가슴에 흘러내리는 축축한 슬픔의 이슬 방울을 알까-- "아, 이거 참 수고하셨습니다. 저 호국단 사단 운영위원 김달규입니다. 감사합니다." 강사범은 그렇게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인사를 청해오는 ROTC 단복 차림의 학생을 바라보았다. 갓 나온 두부 모서리처럼 각진 사각모를 쓰고 흰 단복(團服)을 입은 맑은 얼굴의 학생이었다. "무슨 ㄲ니까?" 강사범이 물었다. "법대 법학과 삼학년입니다." "제 선배님이군요......" "네?" "아닙니다. 청룡관으로 한 번 놀러 오십시오......" "네, 한잔 대접하러 가겠습니다. 즐겁게 노십시오. 마침 블루스군요." 강사범은 청년을 향해 웃어보이곤 다시 운동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웠다. 서로서로 어깨를 싸안은 남녀 학생들이 <댄서의 순정>이란 곡에 맞추어 밤바다 위에서 흐물거리는 해초들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라이트가 그들의 머리 위를 섬광처럼 번뜩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길다란 줄처럼 이어져서 돌아가는 불빛의 끝에 상미, 그녀의 분홍색 한복이 마치 회색 시멘트벽을 타고 올라가다가 피어난 줄장미 붉은꽃 한 송이같이 화사하게 비쳐들고 있었다. "끝났어요?" 허리 높이만한 스탠드 위로 강사범이 모둠발로 뛰어 올라가자 상미가 그렇게 물었다." "네, 가볍게......" "강아저씨가 이학교 경비대장이에요?" "잘못하면 강아지라고 하겠소." "그래요, 잘못하면......" 눈을 반짠이며 상미가 말했다. "나는 흑인 경비대장이구 상미씨는 이 성의 공주......" "왜 하필 흑인 경비대장이죠?" 상미의 말에 강사범은 그녀의 흰 손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엄지 손톱이 눌러 놓은 것처럼 커다란 손이었다. "제 손은 미워요." 바위틈 사이에 숨어 있다가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놀라서 바위틈으로 달아나는 작은 게처럼 그녀의 손이 재빨리 뒤로 돌아갔다. --그래요, 아가씨...... 난 흑인 경비대장이고 당신은 이 커다란 성의 공주예요. 그래서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공주, 먼 발치에서 당신이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릴 때 그 주위에서 창을 들고 눈을 부릅뜬 채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위험을 물리칠 의무를 가진 흑인 경비대장-- 강사범은 낮달처럼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잠시 갖다댔다. "제 손은 너무 미워요."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작게 말했다. "누구든지 자신의 몸에 한 군데씩은 남에게 보이기 싫은 구석을 가지고 있는 거랍니다." "강아저씨두?" "그럼요. 자 여길 봐요......" 강사범은 그렇게 말하며 와이셔츠를 걷어 팔뚝을 그녀에게 보였다. "어머!" 거기 강사범의 팔뚝에는 볼펜으로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것 같은 칼자국이 보기 흉하게 나 있었다. "왜 그랬어요?" "아까 그자, 봤지?" "네, 얼핏 봤어요. 칼을 든 걸......" "이게 바로 그자의 솜씨야!" "무슨 일로 싸웠어요!" "그건 아주 간단해.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자가 이곳에서 힘의 왕이었거든. 싸움대장이었지. 그런데 내가 이곳에 와서 도장을 여니까 자신의 왕위를 뺏기는 줄 알았던 거야." "이 학교에도 운동하는 학생들이 많을 텐데요?" "후후, 상미는 잘 모르는군. 운동하고 싸움은 다른거야. 이를테면 스포츠란 일정한 규율을 두고 하는 싸움이지. 레슬링을 할 때 아무리 악독한 반칙왕이라고 하더라도, 실례, 상대방의 급소를 차지는 않는단 말야. 그러면 단박 죽어버리니까 말이야. 그리구 권투고 태권도고 유도고간에 서로 훈련된 사람끼리의 기술을 거는 것이거든. 예를 들어서 유도를 하는 사람이 전혀 못하는 사람을 들어서 내던지면 즉각 뼈다귀가 부러지지만 서로 유도를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은 거지. 그러니까 싸움은 운동하고는 달라. 그건 어떤 치사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방을 이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아까 그자하곤 어떻게 싸웠어요? 강아저씨는 스포츠맨 아니예요?" 강사범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뱃불의 빨간 불꽃이 어둠이 너무 진해서인지 꼴깍 삼키고 싶도록 예쁜 분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난 싸움으로 살아왔어, 내 생애를 걸고 말이야. 싸움을 먼저 배우고 운동을 했다고나 할까? 놈이 내 팔에다가 이렇게 흉한 상처를 만들어 주었지만, 난 그놈의 턱을 부숴 버렸어. 그래서 놈이 한 달이나 입원해 있을 정도로 말이야......" "그래서 무슨 이익이 생겼어요?" --여자들이란-- "그게 여자와 남자가 다른 점 아닐까? 옛날 서부영화에 보면 총잡이가 어느 동네에 총 잘 쏘는 사람이 있다면 불원천리 찾아가 모가지를 걸고 빵빵하고 싸우는 거 있지? 그게 뭐냐하면 승부욕이라는 거야. 이기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 주고 싶은 마음, 그게 남자의 마음이지......" 상미가 콜콜 웃었다. "왜?" "얘기가 갑자기 화장실 쪽으로 가니까 그렇잖아요?" "화장실 쪽이라니?" "아저씨 은근히 밝히는 데가 있어. 자 그러지 말고 우리 신나게 춤이나 추어요, 디스코!" "디스코 자꾸 추면 디스크 환자된대......" "자, 빨리요." 스텐드에서 뛰어내린 강사범은 팔을 뻗어올려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다 넣고 반짝 들어내렸다. --검불처럼 가벼운 여자군. 마치 금새라도 날개를 달고 풍선처럼 운동장 허공으로 날아 올라갈 것 같애-- 귀청 째질 듯한 곡에 맞춰 광란의 디스코가 한 차례 흐르고 다시 조용한 블루스로 곡이 바뀌었다. --정이란 무엇인가-- 그런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나 블루스는 잘 못추는데......" "저두 남의 발등 안 밟을 정도예요......" 가슴에 그녀가 가볍게 안겨왔다. 꽉 힘을 주어 껴안으면 모래성처럼 후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밤에 혼자서 운동장을 뛰어 본 일 있어?" "아니......" "가슴이 꽁치먹고 체한 것 모양으로 꽉 막혀서 답답하면 이리로 와서 혼자 뛰지. 일직선으로 넓은 운동장을 달려 나가는 거야......" "아저씬 언제 가슴이 답답해?" "그 아저씨 소리 싫다." "그럼 ?" "그거 말고 다른 걸로 부르지......" "뭘루?" "좋은 걸루......" "그럼 자기 어때? 그럴까......" "앞에다 한 자만 더 붙이지......" "뭘?" "강자......" "강자기 후후, 무슨 도자기 이름 같지만 좋아요. 강자기, 강자기, 또 무슨 기계이름 같지만 좋아요. 강자기. 우리 애프터할까?" "애프터?" "응, 다시 만나는 거 있잖아." "좋지." "내가 엽서할께......" "어디루?" "백곰대학 법학과 이학년 강자기. 그렇게 하면 되잖아......" --자, 이걸 어떡한다.-- "그래......" 강사범은 문득 아까 ROTC 단복을 입고 있던 호국단 간부의 얼굴을 떠 올리곤 그렇게 대답했다. 축제는 끝났다. 학교 앞은 다시 조용해졌다. 술렁거림이 끝나고 일상의 그 따분한 흐름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다시 운동이 시작되었다. "서대동씨, 내 긴히 할 말이 있는데......" 강사범은 대련이 끝나 매트리스 위에 정좌하고 앉아 있는 서대동을 불렀다. "네, 사범님!" 도장 안에서 그는 강사범에게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 강사범은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무슨 부탁이든 말씀 허슈!" 서대동이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지금부터 해야 할 얘기 때문에 우울해진 강 사범은 그냥 천천히 길을 걸었다. 며칠 동안 강사범은 그 축제의 마지막 날에 만났던 상미를 잊어 버리려고 애를 써봤다. 왜냐하면 애당초 축제라든지 여대생 따위는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과 관객 사이처럼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 같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강사범이었다. 대학교 근처에서 태권 도장의 월급 사범으로 일하면서 공기 싸늘한 밤 운동장을 빼놓고는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본 것도 그 축제날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하게도 대학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런 인연을 맺게 될 줄이야. "오늘 강형, 영 후들후들 텍스로 노는데." "응?" "왜 그렇게 희미하냐 이겁니다, 세레피아 잡쉈수? 아, 무슨 할 얘기가 있다면서요?" "한잔 하면서 천천히 얘기하자." "시장 쪽으로 갈꺼유?" "왜 아이쇼핑 하구 싶어?"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니 이왕이면 미니스커트라구 그쪽으로 갑시다." "그러지 뭐" 버스 종점을 왼쪽으로 돌아나가면 거기 큰못시장이 있었다. 옛날엔 <큰못>이라고 불리던 연못이 있었는데 그걸 매립해서 시장으로 만든 곳이었다. "한 번 빠지면 못 나와." "난 수영을 잘 하니까" "장화 신고 들어가라구." 언제부터인가 큰못시장은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시장 주위에는 백여 개의 <니나노> 집들이 들어차 있었고, 한 집에 보통 3명씩의 아가씨가 있다면 약소하게 계산해도 약 3백여 명의 꽃순이들이 거기 우글거리고 있는 셈이었다. 해서 백곰대학 학생들의 동정(童貞)은 그 큰못시장에 한 개의 잘 익은 고추처럼 자주 떨어졌고 카추샤 줄거리 닮은 사건도 심심찮게 화제거리로 등장하곤 했다. "강형 저기 좀 보슈......" 서대동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까 얼씨구, 그 양쪽으로 빽빽한 니나노집 가운데에 신장개업한 맥주홀이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그 뭐냐, 목포집, 쌍과부집, 오가집 하는 따위의 호닥데기 니나노집들이 즐비한 술집거리에 이름도 점잖게 <금자갈 비어홀>이 나타났으니 그야말로 좀 생경한 것이었다. "강형 양서로 읽읍시다." "그러지 뭐" 술. 인류의 적, 마셔서 없애자. 강사범은 맥주잔을 높이 들었다. 노란 맥주잔 건너편에 보이는 천장에 매달린 호도알만한 붉은 전등 하나 문득 상미의 깨끗한 얼굴이 거기 어른거렸다. 자신의 입술에 와 닿던 상미 이마의 낮달 같은 싸늘한 감촉. 놀란 계집처럼 치마 폭으로 숨어들던 그녀의 두 손. 술. 천천히 뱃속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상미라고 그러던가?" 강사범이 입을 열었다. "알았다. 강형의 우울을......" "그게 아니라 나한테 엽서를 하기로 했단 말이야......" "어쩐지 첨부터 오가는 눈길 속에 싹트는 전기더라. 그런데 그게 뭐 걱정이유?" "학교로 옆서를 띄우겠다니까 문제지......" "아하, 감잡았다. 그게 고민이란 말이유? 지까짓 게 그까짓 거란 말씀이유? 뭘 고런 걸 가지구 걱정을 허슈. 내 강형이 원한다면 우리학교 입학식 졸업식 다 시켜줄 수 있수다." "어떻게?" "강형, 우리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백곰대학의 학생이 몇명인 줄 아슈? 팔천 명이에요, 팔천 명. 교수 직원까지 합하면 만 명이 넘는 식구란 말입니다. 자, 신입생 이천 오백 명이 입학식을 한다고 합시다. 그걸 일일이 어떻게 확인하겠수? 신입생, 신입생 친구, 학부형, 재학생, 잡상인 그렇게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들어 오는데 그걸 어떻게 확인하고 입학식을 하느냐 말입니다. 졸업식이요? 그건 입학식보다 더하니까 말할 필요두 없지요. 졸업 가운이야 사진관에 가서 돈 천원 주고 빌리면 되는 거 아뉴? 졸업 때 보면 그런 일 부지기수입니다. 코스모스(후학기) 졸업이 창피해서 졸업식만 먼저 하는 패들도 수두룩하구요, 시골에서 소 팔고 논 팔아서 향토장학금 우송해 주니까 놈씨에게 바친 여대생, 강형 생각해 보슈. 두 사람이 한방 쓰면서 하숙하는데 하숙비만 칠만 원이유, 하숙하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한 달 십만 원은 든단 말입니다. 하숙생들 둘이 연애를 하다가 곰곰이 계산을 해보면, 그렇게 간단한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생리욕구도 해결되구요, 그러나 그게 길게 갑니까? 남자란 놈이 슬슬 시간이 되면 이렇게 나가지요. 야, 내가 공부할 테니까 넌 쉬어라. 그리구 여자네서 올라온 돈까지 남자 밑으로 들어가다가 어쩝니까? 군대에 훌쩍 가버리는 거지요, 골빈 여대생, 졸업식 가까워져서 후회해 봤자 말짱 도루묵이죠, 그런데 우리딸 졸업한다구 시골서 부모님, 고모, 이모, 새벽차 타고 올라온다고 편지는 왔지, 어떡합니까? 사진관에 가서 가운 빌려 입고 식장에 들어가는 거지요, 그래서 사진 찍고 냉면 한그릇 먹은 다음에 너 졸업장 좀 보자, 그러면 며칠 후 가운 반납하고 받을 거예요.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까짓 편지 받는 거? 문제될 거 하나도 없어요. 아마 법학과도 교수실 앞에 학년별로 우편함이 있을 거예요. 가서 꺼내 오면 끝이에요, 학교 조교들 눈코뜰새 없이 바빠서 그런 거 확인할 새가 없어요. 낯선 이름의 편지가 오면 누가 복학했나부지, 그러면 끝이에요.] "정말 그애한테 엽서 오면 좀 갖다 주겠어?" "글쎄, 염려 푹 놓으시구 걱정일랑 시집 보내시라니까요. 그나저나 여기 이런 꽃밭에 와서 맨숭맨숭하게 앉았을 게 아니라 꽃순이들 불러서 신고나 한 번씩 시키고......" 강사범이 웨이터를 부르려는데 쨍그렁 하고 맥주병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어서 맥주잔이 술집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서 쟁그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야 니들, 신고하라면 냉큼 해얄 게 아냐." "아니 누가 안한댔어요? 왜 야단이에요?" "뭐라구? 이것들이." "손님 참으세요." "넌 뭐야." "여기 지배인입니다." "지배인? 웃기고 자빠졌네......" 다시 맥주병 하나가 날아가서 벽에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칸막이 좀 치워 봐......" 강사범의 말에 서대동이 테이블 옆으로 둘러쳐 있던 이동식 칸막이를 치웠다. 짐작한 대로였다. <맨손>의 졸병들인 <악발이> <구두> <칠면조> 였다. 주먹이랄 것도 없는 놈들이지만 <깡> 하나만은 알아주는 치들이었다. 술집이 몰려 있는 골목이면 으례 그런 패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술집에선 어리숙한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그러다가 시비가 나면 자동적으로 그 패들이 몰려오게 마련이었다. 또 그들은 꽃순이들을 괴롭히고... 그러니까 필요악의 존재들이었다. "손님들 정말 이러시겠습니까?" 그렇게 나서는 지배인이란 사내의 어깨가 우람했다. 그도 역시 <맨손> 같은 소악당들 때문에 고용된 뒷골목 어깨이리라. "그래 어쩔꺼야 엉?" 벌써 악발이는 상모서리에 깬 맥주병을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나 지배인이라는 사내도 녹녹치 않았다. 어차피 이자들이 이걸로 날 찌르려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투였다. "글쎄 이러지 말고 앉아서 얘기합시다. 다른 손님들 생각도 해주셔야지.] "누가 너 보고 이바닥에 와서 물장사하라고 했어?" <구두>가 거들었다. 요컨대 그 <구두>의 말이 본론이었다. "그럼 늬들한테 허가증 받아야 되니?" 지배인이란 사내가 맞받았다. 이제 얘기는 끝난 것이다. 어떤 종류의 협상에도 응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저놈은 박치기를 한다구." 강사범이 스포츠형으로 머리를 짧게 깎은 <칠면조>를 가리키며 서대동에게 속삭였다. 강사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칠면조의 머리가 술집 지배인의 면상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건 바로 직격탄이었다. 불꽃처럼...... 그들은 어우러졌다. 지배인의 스트레이트에 악발이가 뒤로 벌렁 나가 자빠졌다. 지배인의 얼굴에서도 피가 튀고 있었다. <구두>가 지배인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협공이야!" 강사범이 다시 속삭였다. 구두의 무릎이 지배인의 복부를 걷어차는 것과 동시에 칠면조의 머리가 다시 지배인의 얼굴을 향해 박격포처럼 날아갔다. 일몰 콜드게임. 상황 끝. "야 술 가주와!" 그들은 벌컥벌컥 맥주 한 병씩을 비우곤 일어섰다. "놀다 가슈!"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강사범에게 악발이가 아는 체를 잠시하곤 재빠르게 그곳을 빠져 나갔다. 방범 아니면 순경이 도착할 시간이 가까와진 것이었다. "저 실력 가지구 큰못시장에서 어떻게 장살 하지?" "사라지겠지 뭐......" 그건 틀림없었다. 그 덩치 큰 지배인은 내일 새벽에 작은 트렁크에다 몇 가지 옷을 넣고서 새벽 차를 탈 것이다. 아니면 어디 가서 자신을 밀어주는 큰 주먹을 불러오든지, 만일 그렇게 되면 그건 전쟁이었다. <맨손>이 하다못해 다시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 할 것이었다. 밀려나면 사라져야 하기 때문에...... 큰못시장의 왕초자리를, 종점의 대장자리를 어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켜 나가려 할 것이었다. "우리도 나가지......" 거기 더 앉아 있어 봤자 십원어치의 이득도 없었다. "여기 얼마냐!" 아직 대자로 누워 있는 지배인에게 모여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여자들을 향해서 강사범은 그렇게 소리쳤다. 그 중의 한 여자가 일어섰다. "미안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져서, 손님들......" 적당히 굴러먹은 냄새가 물씬거리는 여자였다. "오늘은 예고편일 뿐이요, 내일이 문제지요." 강사범의 말에 여자가 이윽한 눈길로 물었다. "당신이 이건가요?" 가볍게 올라가는 여자의 엄지 손가락. 무엇으로 눌러놓은 것 같은 상미의 엄지 손가락이 생각나서 강사범은 쿡쿡 웃었다. "이동네 태원도장 사범입니다." 서대동이 그렇게 말했다. "좀 도와 주시겠어요?" 강사범은 대답 대신 만원짜리 한 장을 계산대 위에 놓으며 말했다. "계산해 주슈!" "제발, 좀 도와주세요, 전 혼자예요......" 여자가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파출소에 전화 안했나요?" 서대동의 말에 여자가 쓰게 웃었다. 다 알면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제가 한잔 사겠어요." 여자가 카운터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서대동은 신이 나는 눈치였다. 아, 또 한 시간쯤 이 여자의 넋두리를 들어줘야 하겠구나, 육이오 전에는 잘 살았었다는 얘기, 얼마나 고생고생해서, 이만한 술집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설, 원하신다면 무엇이든지 드리겠다는 애원. 그러나 돈은 아니겠지. 상미야, 내 주위에선 이런 일만 일어난다. 이게 삶의 현장이야, 넌 알겠니? 사람들이 왜 싸우고 왜 우는가 하는 그 근본을 아니? 그건 경쟁이야, 말하자면 살아가는 일들이지...... "자, 드세요." 여자가 익숙한 솜씨로 잔을 채웠다. "마음 푹 놓고 천천히 드세요." 강사범은 그렇게 말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한군데도 빈틈없이 가꾸어진 모습이었다. 부드럽게 웨이브한 머리, 불빛을 받으면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이어링, 수술한 쌍거풀눈, 그래서 눈을 깜박일 때마다 좀 거북해 보이는 눈두덩이에다 칠한 푸른빛 아이섀도우, 가짜 속눈썹, 진한 빨간색 루즈, 은회색 매니큐어, 가슴께가 푹 파여서 부드러운 유방의 일부가 들여다보이는 검은 드레스, 왼쪽 가슴에 달린 장미, 붉은 장미...... --이 여자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양은 대야에다가 수건, 비누, 양말조각, 때미는 수건, 머리빗을 담아들고 나오는 이 여자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일까--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여자가 다시 술을 따르며 그렇게 물었다. "천만네이션입니다. 이 강사범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면 일초도 쳐다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통 말씀이 없으시네요." 여자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참, 술을 마음놓고 마시라고 하셨던가?" "그래요. 운동하시는 분치고 술을 상당히 하시는 편인 모양이죠?" "맥주라면......" 강사범의 말을 받아서 서대동이 얼른 말했다. "화장실만 가까우면 끝없이 마시지요." "좋아요. 오늘 한 번 끝없이 마셔 보세요. 아주 이 술집을 통째로 마셔 버려도 좋아요." "아, 그 말씀 한번 끝내 주시는구먼. 자, 그럼 전 계속해서 먹고 죽겠습니다. 강형, 오늘 꼭지가 확 돌도록 한번 기차게 마십시다." --마시자 한잔의 술-- --술이 왜 술이냐?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니까 술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대동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조잘댔다. "형, 강형, 나 취해서 먼저 실례해야겠어요. 그말 하고나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요. 마담, 이런 얘기 알고 계십니까? 어떤 남자하구 충청도 여자하구 그걸 하는데 말입니다. 그 충청도 여자가 남자보다 먼저 열이 잔뜩 올라갔구설랑에 나 먼저 실례허것시유 했다는 겁니다. 알아듣겠어요? 나 먼저 실례허것시유우!" 서대동은 그렇게 말하더니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재미있는 친구지요?" "네, 그래요. 아주 웃기는 학생이군요." "저 친구 아주 웃겨요. 원래 서대문에서 태어나 이름이 서대문인데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 서대동으로 고쳤다는 친구지요. 저렇게 덜렁대는 것 같지만 공부두 아주 열심히 하구요......" "그럴 것 같애요. 참 그렇게 의자에 앉아 계시니까 불편하지 않으세요? 자리 옮길까요?" "어디루?" "내실로 들어가시죠 뭐...... " "내실이라......" 조그만 방이었다. 비닐 옷장이 하나, 차단스가 하나, 17인치짜리 텔레비젼이 하나. "술을 좀 독한 것으로 가져올까요? 맥줄 꽤 드셨는데 그냥 이렇게 말짱하시니까 재미가 없네요......" 강사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강사범은 생각했다. 단 한잔의 술이라도 얻어 마셨으면 이 여자의 얘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이 여자가 마지막에 어떤 말을 하리라는 것은 이미 정해진 역을 향해서 달려가는 야간열차처럼 명확한 것이라. 그 기차 안에서 고스톱을 하건, 쇠주를 마시건, 앞에 앉아 있는 남의 애인을 보고 음탕한 생각을 하건...... 기차는 어둠 속을 흐르는 물처럼 달려나가서 이윽고 새벽이 되면 머리꼴이 부스스한 승객들을 역전에 토해 놓으리라...... "이건 좀 독한 술이에요." "그래요?" 강사범은 겨우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만한 앙증스런 유리잔에 따라지고 있는 노리끼리한 액체의 술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주무십니까?" "네, 그래요. 여기서 나 혼자 자죠. 전 못된 버릇이 있어요. 잠을 잘 때면 몸에다 아무것도 걸칠 수가 없어요......" "그리구 문도 안 잠그고 주무시겠지......" "그 다음은요?" "아무나 들어오면 환영하나?" "남자에 따라서죠." "어떤 종류의 남자?" 여자가 조금 웃었다. 그러더니 여자의 손이 조그맣고 동그란 술상을 너머 곧장 강사범의 앞가슴으로 왔다. 여자가 조금 손을 움직이자 강사범이 입고 있는 트레이닝 옷의 지퍼가 간단히 명치 끝 밑으로 내려왔다. 손이, 은회색 매니큐어를 칠한 여자의 가느다랗고 매끈한 손이 강사범의 딴딴한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여자가 말했다. "이렇게 튼튼한 남자라면......" 강사범은 씩 웃었다. "음악을 틀까요?" 전축 같은 건 그 방에 보이질 않았는데 여자가 가늘게 실눈을 뜨며 말했다. 강사범은 담배를 붙여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세트였다. --당신에게서 꽃내음이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 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 당신의 마음은 장미를 닮았네요-- "마담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몇 잔째의 위스키를 마시자 강사범은 자신의 모든 근육이 해파리처럼 풀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제 이 여자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들어볼 때가 왔다는 생각에서 강사범은 그렇게 물었다. "남들이 절 장미마담이라고 부른다는 얘길 안했던가요?" "그래서 이를테면 당신 주제가를 틀어놓은 건가?" <장미>라는 노래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래요." 여자가 심각하게 말했다. 허허, --이 여자는 주제파악의 지름길이라는 책을 보지 못한 모양이군. 뭐라구, 지까짓 게 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장미라구? 무드 깨는군-- "나 그만 일어서겠소." 말만이 아니라 강사범은 정말 벌떡 일어섰다. "왜요?" "갈 사람은 가야지!" "누가 기다리나요?" "아니." "그럼요?" "갈 시간이 됐으니까......" "뭐가 기분 나빴어요?" "아니, 뭐랄까. 너무 정신을 잃으면 자신의 자리를 잊어버리는 수가 있거든, 아마튜어일수록 그런 셈이지. 올봄에 말이야. 아마튜어 권투 신인왕 선발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4회전 게임인데 말이야. 홍코너의 선수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지독하게 두들겨 맞았거든. 그리고 케이오 직전에 겨우 공이 울려서 살아났단 말씀이야. 그런데 이 친구가 청코너로 휘청휘청 걸어가서는 여기는 내 자리니까 일어서라고 했어. 그러니까 청코너의 선수가 일어설 리가 있겠어? 어이가 없어서 뻥하니 쳐다볼 수 밖에. 그러니까 이 정신없는 친구가 네 번씩이나 여긴 내 자리니까 일어나라고 했다는 거야. 참 웃기는 얘기지." "그래서요?" "그러니까 뭐랄까. 내 자릴 완전히 잊어 버릴 정도까지 케이오가 되기 전에 그만 일어서겠다는 거지......" 여자가 강사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았어요. 그럼 지퍼나 채워드리지요." 여자의 손이 다시 강사범의 가슴 앞으로 왔다. 강사범은 벽에 붙어선 채로 우뚝 서 있었다. 트레이닝 웃도리의 지퍼를 채우고 난 여자의 한 손이 천천히 강사범의 배를 훑어 내려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강사범의 배를 쓸어내리고 있는 여자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강사범은 벽에 등을 기댄 자세 그대로였다. 여자의 손이 강사범의 허리 아래로 거침없이 내려갔다. 이미, 강사범의 그것은 불처럼 화가 나서 트레이닝 옷의 아랫부분을 몽고텐트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이, 이러지 말라구." "좀 그래야 되겠어요." 여자가 단호하게 말하며 강사범의 트레이닝 아랫도리를 확 밑으로 끌어 내렸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그런 형편없는 노래가 카세트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마담 이러면 곤란해" "......" 강사범의 말에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여자는 이미 큰 입으로 남자의 욕망의 끝, 전부를 입안 가득히 물고 있었던 것이다. 강사범은 선 채로 자신을 물고 있는 여자의 머리결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서 그냥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짙은 늪지를 뛰어가는 맨 발바닥처럼 축축한 소리가 여자의 입가에서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담뱃불이 발간 불빛을 내고 있었다. 한바탕 원시적으로 힘든 일을 해내고 난 강사범은 마치 격한 대련을 하고 난 다음처럼 온 몸이 홀가분했다. "후회하세요?" "이 여자!" "왜요?" "그건 남자가 하는 소리잖아?" "대사가 바뀌었군요." "난 말이야......" "말씀하세요......" "손이 예쁜 여자는 싫어......" "호호,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겠어요. 어디 한 군데가 이뻐서 싫다는 남자 처음이에요." "난 손이 미운 여자를 좋아하구 있거든......" "그래요?" 여자가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담배 피겠어?" 여자는 길게 담배 연기를 들이켰다. "이렇게 장사해두 되겠어?" "그 여자 어떤 여자예요. 질투가 나는데요?" "그 여잔 말이야 큰 성의 공주야. 난 그 성을 지키는 흑인 경비대장이구. 그래서 그 여자가 옥으로 만든 목욕탕에서 목욕을 할 때에도 높은 망루에 올라가서 그 여자가 있는 성을 지키는 흑인 경비대장......" 여자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전 흑인 경비대장을 사모하는 늙은 하녀의 딸이라고 해두죠." "어쭈!" "가세요, 그만......" "할 얘기 없어?" "없어요. 전 나가봐야 해요." "화났어?" "아뇨, 어차피 사람마다 가는 길이 다르니까요." "내 한가지만 얘기하지. 내일 저녁에 오늘 왔던 놈들이 와서 또 행패를 부리거들랑 내가 여기서 자고 갔다구 얘기하라구......" "싫어요, 당신 이름 팔지 않겠어요. 차라리......" "차라리?" "글쎄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가세요......" "미안해." "아니 괜찮아요." 강사범은 내가 이 여잘 너무 우습게 봤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좀더 고차원적으로 날 잡으려는 수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내일 저녁에 또 들르지. 아뭏든 말야." "그러세요, 생각나시면......" 2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그 후로 이틀 저녁을 거푸 살롱 금자갈에 들렀지만 장미 마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종업원들 얘기론 어딘가 잠시 다녀온다는 말만을 남겼다는 것이었다. "강사범님 내 좋은 소식 하나 전하리까?" "뭔데?" "금자갈 장미마담하구 강사범하구 거시기한 사이라구 소문이 짜합디다." "쓸데없는 소리!" 그런 소문이 있다면 아마 네가 지껄이고 다니는 거겠지. 강사범은 서대동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나 저나 그런 소문이 내가 물먹고 있는 이 바닥에 퍼지는 것은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야. "현장을 들켜두 오리발을 내밀어라, 그거 실천하는 거유?" "왜 이래, 이거. 그래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게 바로 그 얘기야?" "정말 썸씽 없수?" "없어." "좋시다. 내 정말 좋은 소식 전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목에 꽉 힘주고 그러기요, 정말?" "글쎄 그 좋은 소식이라는 게 뭐냐구?" 서대동은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강사범 앞에 불쑥 엽서 한 장을 내밀었다. <법학과 이학년 강민우.> 강사범은 가슴이 뜨끔해졌다. 갑자기 대학생이 돼 버린 자신의 모습이 그 엽서 표면에서 어른 거리는 것 같았다. 황급히 엽서의 뒷면을 보니까 아, 거기 <전상미>라는 예쁜 글씨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흑인 경비대장 강자기에게 고함. 며칠 전 나 홀로 쓸쓸히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음. 가을, 잘 구워진 센베이과자 같은 플라타너스 낙엽이 건방지게 길가에 뒹굴고 있었음. 이자가 먼저 애프터를 하자고 하고 이렇게 고귀한 글을 씀에 대해서 공주를 모시고 있는 경비대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함.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 않을시는 3개월간 급료를 지급하지 않을 것임--. 그리고 거기 전화번호가 얌전히 씌어져 있었다. "강형, 중심 단단히 잡아야 하겠시다. 나도 그 엽서 잠시 본의 아니게 업무상 과실로 잠깐 훑어 봤는데 그 아이 아주 개지랄입디다." "개지랄?" "허허, 그건 개성적이고, 지성적이고, 발랄하다는 말의 준말이에요." "그래? 대학생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그런 요상한 말만 만들어 내나? 난 여기 와서 아주 입맛 다 버렸다구. 뭐라더라? 식인종 셋이 버스에서 내리면서 토큰을 두 개만 내니까 차장이 왜 두 개만 내냐고 했더니 아니 도시락도 차비내는 거 봤어? 그랬대며? 그러니까 식인종 둘이 또하나를 데리고 식사하러 가는 중이었다구?" "에이, 그건 삼월판이에요, 그 식인종 시리즈는 여름판, 가을판까지 새로 나왔다구요. 여름판이 뭔지 알아요? 식인종 여자가 애를 낳았는데, 남편이 쓱 들어오니가 나 아들 낳았어요 라고 말하는 대신 애기를 번쩍 들어보이면서 식기 전에 드세요, 그랬다는 게 여름판이구. 그 애를 낳아가지고 어깨에다 둘러메고 친정엘 갔더니 친정어머니가 얘, 먹는 음식을 그렇게 다루는 게 아니다, 하더라는 것이 최신 가을판이에요." "아니 도대체 그런 얘기를 누가 만드는 거야, 왜 만드느냐구......" "강형, 진실은 소풍 가구 허위가 보초 서는 세상 아뉴? 헌다하는 사람들이 입만 뻥끗하면 송아지 껌 씹는 소리나 허구,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구 천방지축 다니면서 전자 오락이나 허구, 썰이나 풀구, 술이나 꺽고, 그러는 줄 알면 큰 일이에요, 우린 다 배우고 있단 말입니다. 법학통론에서 헌법과 민주주의도 배우고, 국어시간에, 철학시간에, 지행 일체도 배운단 말입니다. 또 어떻게 해야 학점을 알프스 드링크로 따구 졸업을 해서 취직하구 한다는 것을 다 배운다 말입니다. 진리와 현실 사이에서 가슴만 자꾸 허전허니까, 자꾸자꾸 허전허니까 잠깐이라두 웃자구,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살자고 그런 거 맨들어 내는 겁니다, 알기나 알아요?" "글쎄, 난 대학생이 아니라 놔서......" "강형, 그런 소리 말아요. 우리나라 젊은이는 다 대학생이에요. 진리와 현실 사이에 있는 대학생이란 말입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서대동은 몹시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서대동의 그런 표정을 강사범은 한 번도 전에는 본 일이 없었다. 강사범에게는 마냥 행복하게만 보이는 그들에게도 숨겨진 어떤 종류의 우울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 갈라우......" 패앵, 하고 요란하게 코를 풀어 젖히더니 서대동은 그냥 가버렸다. 저 친구에게 저런 구석이 있다니...... 강사범은 도장문을 빠져나가는 서대동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언뜻 다시 상미의 엽서를 들여다보았다. --흑인 경비대장 강자기-- 이 아이는 내 가슴에 내밀히 흐르는 슬픔의 냇물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어째서 내가 자기에게 흑인 경비대장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알까, 잡초처럼 시궁창에서 자란 내 몸에서 나는 생활의 땀냄새를 알까. 강사범은 전화의 다이얼을 돌렸다. 차가운 금속의 서늘함이 손가락을 타고 그의 전신에 흘러들고 있었다. "전상미씨라고 계신가요?" "누구시죠?" "저 백곰대학의 강민웁니다." "아, 강자기! 내 경비대장!" "맞아요, 전 검둥이입니다. 시간 있어요?" "촌시럽게 시간은...음, 좋아요. 어디서 만나죠?" "공주님 좋을실 대로......" "응, 그러면 광화문 비각 옆에서 만나죠." "좀 정확히 말씀하십시오." "좋아요. 정확히 말하라고 했죠? 광화문 비각에서 중앙청 쪽으로 있는 두 번째 쓰레기통, 어때요?" 하얀바지, 주황색 블라우스, 손 안에 탁 쥐어지는 조그만 밤색 핸드백.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한복을 입었을 때와는 달리 서대동의 말마따나 지성적이고 발랄해 보이는 그녀가 나타나자 후들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강사범이 물었다. "강의 듣구, 애들 만나구, 테니스두 치러 다니구......" "테니스 치러 갈 때도 바지를 입습니까?" "테니스 칠 때 입는 옷이 있어요. 윗도리하구 치마하구 붙은게 있어요. 그런 얘기만 할 거예요?" "우리 뭘할까. 야구구경갈까, 중국무협영화 보러 갈까?" "남자들은 왜 중국영화를 좋아하죠? 두 시간에 이백 명도 넘게 사람을 죽이는 중국영화가 무슨 재미가 있어요? 순 엉터리 영환데......" "뭐가 그렇게 엉터리로 보이지?" "조금만 따져봐도 그건 엉터리에요. 중국 영화를 보면 땅에서 지붕 위루 훌쩍훌쩍 뛰어 오르는 장면이 많은데 세계 올림픽 높이뛰기 기록이 얼만지 아세요?" "아냐,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 그게 경신술이라는 건데 우리나라에서도 검도술 계통에서는 이십 미터 높이에서 가볍게 뛰어 내리는 건 예사라구. 닭이 횃대에서 떨어지는 수법으루다가......" "그럼 장풍은요? 손도 안 대고 십 미터 밖에 있는 바위를 깨는 거는요?" "그것도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야. 우리도 격파술을 배울 땐, 손바람, 즉 장풍으로 촛불을 끄는 연습을 하거든 소림사 권법에는 보통 십팔계가 있는데......" "그 소림사란 게 정말 있어요?" "그럼. 중국 하남성 동봉현 호산에 있는 임제종의 대가 사람으로서......" "중국 무협계 얘기만 하실 거예요?" "참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우이동에나 가죠, 가을인데." "공주님 명령이라면......" 평일이라 그런지 우이동은 한산했다. 그린파크 위쪽으로 올라가는 아스팔트 길에는 바알간 솔가지가 쌓이고 있었다. 산에는 이미 단풍이 한창이었다. 백운대 밑으로 갈색과 진주황색의 붉은 단풍들이 화장한 여자처럼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상미의 말마따나 잘 구어진 센베이 과자처럼 발 밑에 밟혀 바삭거리는 낙엽들이 사방에 뒹굴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쓸쓸해졌군." 봄부터 한여름 내내 그 무성한 나뭇잎들을 거느리고 있던 나무들이 잎들을 털어내 버리고 쓸쓸히 서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견디리라. 인동(忍冬)의 그 쓰라림을...... "비가 오려나 봐요......" 상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휘익 둘러보고 그렇게 말했다. 백운대 저쪽 하늘 한 가장자리로부터 뿌연 구름떼가 몰려오고 있었다. "야구장에 안 가길 잘했군......" "그래요. 운동장엔 비를 피할 데도 없을 텐데......"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그들을 향해 빈대떡을 부치고 있는 뚱뚱한 아주머니가 막걸리 한잔 하고 가라고 말을 붙였다. "목이 칼칼한데 한잔 할까?" 강사범의 말에 상미는 대답 대신 밝게 웃어 보였다. "어쩌면 아가씨가 이렇게 인형처럼 예쁠까!" 빈대떡과 막걸리, 그리고 도토리묵을 비치 파라솔에다 갖다 놓으면서 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정말 예쁘죠?" 강사범이 거들었다. "정말예요, 어쩜 이렇게 예쁠까?" 아주머니는 두 손을 마주잡고 서서 잠시 상미를 더 바라 보다가 아이참. 내 정신 좀 봐, 그럼 천천히 많이 드세요. 하고 돌아갔다. 숲속에는 열댓 개의 파라솔이 놓여져 있었다. 연한 갈색의 도토리알이 뒹굴고 있었고 잔디는 아,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을잎 찬바람에 흩어져 내리고 캠퍼스 잔디 위에 또 다시 황금 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들-- 그런 노래가 천천히 천천히 그 숲속에 애절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막걸리가 무드 때문인지 여름 해변의 얼음 채운 깡맥주처럼 시원했다. "좀 먹어보지......" 강사범이 미끌거리는 도토리묵을 나무 젓가락으로 집으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말했다. 상미가 그말에 고개를 숙였다. "왜?" "손이 미워서요......" 화가 난 듯이 그녀가 말했다. "난 이쁜걸......" 강사범은 왼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싫어요?" 상미의 볼이 빨개졌다. 그래도 강사범은 상미의 손을 더욱 꼭 움켜 쥐었다.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방울의 물기도 지니지 못하고 바짝 말라서 떨어진 낙엽들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했다. "어, 이거 비가 제법 많이 오는 걸!" 빗방울 뿐만이 아니었다. 수상한 소리로 와삭거리면서 바람이 거세게 일어오고 있었다. 비는 저만큼에서부터 마치 한줄한줄씩 금을 그어 보듯이 그 금이 한 칸씩 다가올 때마다 거센 빗줄기로 변하고 있었다. "이거 어떡허지?" 커다란 우산만한 비치 파라솔은 바람과 함께 뿌리는 비 때문에 두 사람을 비로부터 감춰줄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학생손님들, 비가 너무 와서 안 되겠어요. 방으로 들어오세요......" 뚱뚱한 주인 아주머니가 그렇게 소리쳤다. "안 돼겠어. 상미, 우선 비를 좀 피하자구......" 강사범은 상미의 손을 잡고 가게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강사범은 상미의 손을 잡고 가게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그 방으로 들어가세요. 방이 따뜻하다우. 요샌 낙엽을 긁어 때니까 아주 따뜻해요. 술상을 그리로 봐 드릴까?" "그러세요......" 방으로 들어가자 강사범의 눈엔 흙물이 튀어올라 더러워진 상미의 하얀 바짓가랑이가 보였다. "바지자락을 좀 걷지......" "괜찮아요......" "내가 걷어줄까?" 강사범이 허리를 구부리자 "싫어요, 싫어......" 하면서 상미가 콩콩 강사범의 등을 때렸다. 강사범은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밉지만 아주 따뜻한 손이었다. "싫어요, 싫어......" 상미가 다시 그렇게 중얼거렸다. "우리 앉자구, 이렇게 서 있을 수는 없잖아. 지붕이 무너질 것도 아닌데......" "약속해요......" 두 손을 강사범에게 잡힌 채 상미가 말했다. "뭘?" "조용히 그냥 있겠다구......" 강사범은 상미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이 아이가 떨고 있군. 사방이 벽으로 막힌 방에 들어오니까 갑자기 내가 늑대로 변할까봐 겁을 먹고 있어. 그러나 이 귀여운 아가씨야, 내가 정말 너에게 어떤 흑심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건 우리들의 첫 데이트야. 내가 무슨 카사노바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어쩌겠니, 괜찮아 이 꼬맹이야...... "바보,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군......" "전 여자니까요......" "그래, 넌 여자야, 가을 코스모스같이 말갛고 청순한 여자, 자 앉으시지." 그제서야 상미가 굳었던 얼굴을 풀고 웃었다. "미안해 아저씨......" "그 아저씨 소리 듣기 싫다니까......" "참, 또 미안......" "앉자구......" 주인 아주머니의 말대로 정말 따뜻한 방이었다. 강사범은 벽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워물었다. "문 좀 열었으면......" 창문을 바라보며 상미가 말했다. "불안해?" "아니, 나, 담배연기 싫어서......" "끌까?" "괜찮아, 문만 열면......" 강사범은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바람 한자락이 휙하고 방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술상이 들어왔다. 따뜻한 방이었다. 정말 이렇게 따뜻한 방은 참 오랜만이군, 금자갈 살롱의 장미마담 내실도 이렇게 따뜻했었던가? 아니 그 방안에 그런 온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질 않는구먼. 이렇게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었으면...... 군용침대의 그 딱딱한 나무 말고 이렇게 엉덩이에서부터 온몸을 덥혀주는 따뜻한 방에서 다가오는 겨울을 지낼 수 있었으면...... "화났어요?" "아니, 왜? 내가 화난 것 같아?" "아뇨. 그렇게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까......" "난 고아야!" 강사범은 불쑥 그렇게 말했다. 상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사범 자신도 왜 그런 얘기를 불쑥 꺼내놨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고아 출신들에겐 항상 따뜻한 것들이 그리운 법이지. 따뜻한 방, 따뜻한 음식 그리고 겨울 창가에 비치는 따뜻한 불빛이랑, 아이들의 따뜻한 목소리, 그런 게 다 무섭도록 그리운 거야. 고아원에서 뛰쳐나와 내가 맨처음에 한 일이 뭔지 알아? 새벽 기차에서 내리는 손님들을 여관으로 안내하는 일이었어. 거기가 어딘가 하면 마산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었어. 가을 이맘때쯤이면 누런 갈대가 십 리고 이십 리고 강변에 펼쳐져 있는 곳이었지. 난 껌껌한 새벽에...... 내 또래의 불쌍한 아이들과 함께 목을 움츠리고 떨면서 기차를 기다렸어. 부지런한 사과장수 아주머니들이 카바이드 불을 켜놓고 역시 기차를 기다리고...... 카바이드 불빛에 비치는 붉은 사과의 빛깔을...... 그 아름다운 빛깔을 쳐다보는 것이 나의 새벽 일과였지. 그러다가 기차가 도착하면 사람들 사이로 외치고 다녔어. 따뜻한 방 있어요, 따뜻한 방. 아씨, 따뜻한 방, 따뜻한 방......" 강민우 사범은 목이 꽉 메어왔다. 왜 이럴까? 내가 왜 이럴까? 강사범은 폭포처럼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두 주먹을 정권으로 쥐고 방바닥을 힘껏 눌렀다. "강자기!" 상미가 한 손을 들어 강사범의 머리칼을 쓸어쥐며 말했다. "울지 마세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미가 그렇게 말했다. "안 울어, 남자가......" 강사범은 정권으로 쥔 주먹을 들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상미가 앉은 채로 일어나 눈물을 훔치고 있는 강사범의 머리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아. 강사범은 입술을 깨물고 그녀의 가슴 안에서 눈 뒤에 괴어 있던 나머지 눈물을 쏟았다. --바람부는 들녘 한가운데에 한 줄기의 칡 덩굴이 있었네. 아무리 머리 들어보아도, 허공뿐 그의 눈에 닿는 것은 없었네. 한 아이가 와서 거기 자기 키만한 나무를 꽂아주었네. 벼락이 때리고 온 대지가 꽝꽝 얼어 붙어도 한 줄기의 칡 덩굴은 그 나무에 매달려 있었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어 돌아와 보니 그 칡 덩굴은 까맣게 죽어 있었네-- 상미가 조그만 목소리로 그런 시(詩)를 읊조렸다. 상미의 가슴속에서 강사범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상미의 맑은 눈동자 안에 자신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상미가 그 눈동자를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조용히 머리를 숙여 왔다. 꽈리결처럼 투명한 그녀의 입술이 살며시 강사범의 입술에 얹어졌다. 짧은 순간, 강사범은 자신의 몸 전체가 조각조각으로 분해되어 허공에 떠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햇솜같이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이 이내 강사범의 입술에서 떨어져 나왔다. "비가 그쳤어요......" 젖은 목소리로 상미가 말했다. "그냥 이렇게 있고 싶군......"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세요. 사다리를 오르듯이 차근차근히 해야 돼요." 강사범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갑시다." 강사범은 상미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말했다.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고, 언제 그랬더냐 싶게 쨍쨍한 햇볕이 그 숲속에 뿌려지고 있었다. 그들이 막 신발을 신고 방에서 나오려는데 한 떼의 남자들이 왁자하며 그 집으로 들어왔다. --야, 그림 좋다. --우린 이게 뭐야. --벌써 한 번 쪽 했나 부지? --여자가 섹시한데...... 강사범의 눈에서 불이 켜졌다. "그냥 가요......" "왜?" "그냥 내려가요. 괜히 시비나 하는 사람들인데......" 그 소리가 남자들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런 대화들이 차소리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말소리들이 뒤범벅되는 서울 한복판, 시끌짝한 어느 골목이었다면 그쪽에서 하는 소리나 이쪽에서 하는 말이 그렇게 확실하게 서로에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이, 우리가 시비나 하는 사람들이니?" "어떤 방정맞은 년이 그따위 소릴 해!" 강사범은 구두끈을 단단히 졸라매었다. 졸지에 그 가을 코스모스 같은 상미가 방정맞은 <년>이 돼 버렸는데 어떻게 참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거 형씨들 말 좀 세탁해서 합시다." "뭐라구?" "말좀 곱게 하라구, 이자식들아!" "뭐야?" "왜? 내 말이 잘못됐어? 술 처먹으러 왔으면 왔지, 뭐 어떻다는 거야? 조금 전에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 옥수수를 확 뽑아놓을 테니까 말이야!" 놈들은 좀 주춤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쪽이 하도 거세게 나가니까 기가 죽은 때문일까? 그러나 이쪽은 하나, 언제나 숫자를 믿고 만용을 부리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너 말 다했어?" "아직 덜했다. 왜 한 번 벌려 볼래?" "이새끼가!" 그 중의 하나가 그 소리와 함께 발을 들어 옆차기를 해왔다. 주먹보다 선뜻 발부터 올린다는 것은 싸움을 해본 놈이라는 증거였다. 놈은 강사범이 모둠발로 가볍게 옆으로 한 걸음 뛰었다. 강사범이 몸을 피하자 약이 올라서인지 팔을 짝 벌리고 곰이 멧돼지 움키려는 식으로 덮쳐왔다. 생각 같아선 수도로 놈의 명치를 쳐서 쓰러뜨리고 싶었지만 강사범은 이번에도 오른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 바람에 달려들던 상대가 쌓아놓은 빈병 상자에 머리를 들이받았고 이어서 공병 상자가 와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어, 너, 쳤어." 병 무더기에 넘어졌던 상대가 의자를 번쩍 들며 말했다. 이거 보기보다 형편없는 놈들이군. "이것 봐!" 강사범이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그들을 불렀다. 그가 순간 멈칫했다. "너희들 임자 잘못 만났어!" 강사범은 조용히 그렇게 말하면서 왼손으로 굴러내린 맥주병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잘 봐!" 강사범은 그렇게 타이르듯이 말하면서 왼손으로 맥주병을 허공에 던졌다. "얍!" 기합소리와 함께 강사범의 몸이 허공으로 뜨면서 두 발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맥부병을 왼쪽 발, 오른쪽 발로 거푸 걷어찼다. 맥주병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깨졌다. "어때, 손 좀 봐줄까?" 강사범은 그때서야 웃도리를 벗어서 테이블에 척 걸쳐 놓으며 말했다. 의자를 들고 강사범에게 덤벼들려던 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벙벙한 표정으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때 저만큼서 요란한 호각소리가 들렸다. 강사범은 상미를 바라보았다. 이럴 땐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인데 여자가 있으니...... 방범대원 둘이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뛰어 들어왔다. "아이구, 나 죽는다, 나 죽어!" 여태까지 의자를 들고 폼을 잡던 놈이 갑자기 땅바닥에 뒹굴며 소리를 질렀다. "뭐야, 어떤 놈이야?" 방범대원의 뒤를 이어 정복 순경이 뒤따라 오며 소리쳤다. 강사범은 웃도리를 툭툭 털어 입었다. "상미 먼저 가지......" "싫어요." "먼저 가, 내 나중에 전화할게......" "어떻게 저 혼자 가요?" "괜찮아. 난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그래도 싫어요......" "그럼 할 수 없군. 내 쪽의 증인이 돼 주셔야 하겠는걸......" "파출소로 갑시다." 어딘가가 아프다고 뒹굴고 있는 사람을 일으키며 순경이 말했다. "가시죠......" 강사범이 앞장을 섰다. "이놈을 처벌하슈!" 파출소에 들어서자 그들 중의 하나가 강사범을 가리키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아, 글쎄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앉아, 앉으라구......" "민주경찰이 피해자한테 뚝뚝 부러지게 반말이나 하구 말이야......" "글쎄, 민주경찰이구 안민주경찰이구 누가 피해자구 누가 가해자인지 조사를 해 봐야 할 꺼 아뇨." "아니 이 사람이 현장을 보구두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할 수가 있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이렇게 주먹을 함부로 휘두르는 놈이 있단 말이요? 여보, 여기 책임자 좀 봅시다." 연행한 순경과 승강이를 하고 있던 그들 중의 하나가 말했다. "뭐야, 뭐?" 무궁화 하나를 단 파출소 소장이 나섰다. "이 폭력배를 법대로 처리해 주쇼." 오히려 그들이 더 떠들썩하니 설쳐대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개중에 끗발있는 사람이 하나 있겠지. 강사범은 상미를 쳐다보고 쓰게 웃었다. 웃겨, 하는 표정으로 상미도 그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누가 피해자야?" 소장이 물었다. "접니다. 제가 피해잡니다." 아까 의자를 들고 설치던 사람이었다. "어딜 다쳤소." "여깁니다." 그 자가 왼손을 내밀었다. 황망중에 어디에다 긁힌 모양인지 그의 손등에서 피가 조금 흐르고 있었다. "에이, 여보, 그게 다친 거유?" "소장님, 나 좀 잠깐 봅시다." 파출소에 들어와서 제집 안방처럼 꽝꽝 큰소리를 쳐대던 사람이 소장을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나, 이런 데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파출소장에게 보이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해자한테 조서받아서 처리해!" 파출소 소장은 귀찮아서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강사범 일행을 연행한 순경에게 던지듯이 한마디 하고 휙 밖으로 나갔다. "당신 이리와!" 순경이 강사범을 불렀다. 강사범은 순순히 그 순경 앞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당신 보아하니 주먹깨나 쓰게 생겼군......" 순경이 책상 서럽에서 양면괘지를 꺼내면서 말했다. --지겨워-- 강사범은 생각했다. 또 이 사람의 수많은 그 상투적인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하는 건가. 본적, 주소, 주민등록번호, 직업, 전과가 있습니까? 상미, 그녀의 앞에서 그 모든 것을 대답해야 하다니, 내가 아직 수양이 덜 돼서 또 이런 걸 써야 하는 것일까? "순경아저씨, 우리들은 대학생이에요. 불량배는 바로 저 사람들이라구요......" "대학생?" "예, 그래요. 여기 학생증 있어요......" 상미가 조그만 밤색 지갑 속에서 학생증을 꺼내 놓았다. 낮달처럼 하얀 이마를 가진 그녀가 사진 속에서 엷게 웃고 있었다. "대학생이라......" "아저씨, 여기 전화 좀 써도 되죠?" "전화? 어디다 걸려구?" "우리집 고문 변호사를 불러야 하겠어요. 이런 일에는 변호사가 필요하구, 심문을 받기 전에 변호사를 부를 권리가 있잖아요, 안 그래요?" 상미,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또박또박 파출소장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서 일반 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이구, 변호사라니. 강사범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경우 잘하면 훈계방면이구 그도 아니면 즉결에 넘어가서 벌금을 조금 물거나 구류 며칠을 받으면 될 일인데, 변호사라니. 이게 무슨 외국영화의 한 장면인가? "이봐, 상미, 그만 두라구!" "가만 계세요. 누구 왕년에 끗발없는 사람 있어요?" "......" "아빠, 아빠세요? 저예요. 저 지금 우이동 근처에 있는 파출소에 와 있는데요, 최변호사 좀 빨리 보내주세요. 아이 아빠. 제가 뭘 잘못한 게 아니구요, 저랑 데이트하던 남자가, 왜 있잖아요. 저번에 발씀드린 태권도 여섯개나 하는 백곰대학 남학생이요. 여기 놀러왔다가 불량배들하구 쌈이 났어요. 곧 보내주시겠죠? 이십분요? 빨리요. 아빠!" 상미는 그렇게 말하더니 전화를 끊고 강사범이 앉아 있는 의자 곁으로 왔다. "걱정할 거 없어요, 자기 아주 유능한 변호사니까요. 작년에 판사하다 그만둔 사람이에요. 자 그럼 순경아저씨 시작해 보시죠." 상미의 당당한 말에 순경의 표정은 금새 벌레 씹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마 그 파출소에 변호사가 나타나는 일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변호사를 부를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말단 파출소에서 어물거리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은 법이니까 말이다. 순경이 잠시 어정쩡하게 언 표정으로 상미와 강서범을 쳐다보더니 조서용지를 탁 덮고 일어섰다. "당신들두 거기 앉아서 기다리쇼. 피해자든 가해자든 경찰 심문을 받기 전에 변호사를 불러서 의논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당신들도 알죠?" "네, 압니다." 그들은 기가 죽어 있었다. "뭐 많이 다친 것두 아닌데, 어떻게 잘해 봅시다." "뭘 잘해 보자는거요? 당신들이 이 사람을 꼭 처벌해야 한다구 하지 않았소?" "아까까진 흥분해서 그랬는데요." "가만 보니까 당신들 낫살이나 먹구 또 그럴 만한 데 있는 사람들 같은데 젊은 애들한테 시비건 게 당신들 아냐? 조사해 보면 다 안다구. 더군다나 이쪽에서 변호사가 오면 당신들 골치 아파진단 말이야. 정식 재판까지 가서 당신들이 잘못했다는 게 나타나면 구류를 살아야 한다구. 유치장 말이야, 알아들어? 요샌 법이 바뀌었다구. 얼마전까지만 해도 싸움이 나면 무조건 얻어맞은 쪽이 유리했지만 요새는 그렇지도 않단 말씀이야. 원인을 따져서 처벌을 한다구요." "우리도 그 정도는 알아요. 우리가 뭐 꼭 처벌을 해달라는 게 아니라 사실 우리도 술 한잔 먹으러 여기 왔는데 저 친구가......" 얘기가 자꾸 길어지고 있었다. 이젠 그들이 완전히 저자세로 순경에게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서 나갈 수가 없겠느냐고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없었던 일로 하자. 얼마나 좋은 말인가. 큰못시장의 장미마담에게 강사범은 꼭 그 말을 하려고 했다. 마담, 없었던 일로 합시다. 대신 내가 별일없이 장사를 하도록 <맨손>에게 부탁을 해놓을 테니까 당신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제발...... 없었던 일로 합시다. 결론은 났다. "학생들 미허우!" 그들이 강사범과 상미 앞에서 말했다. "좋아요, 그럼 가요. 순경아저씨 수고하세요." 상미는 강사범의 팔을 잡으면서 쌀쌀하게 순경과 그들에게 말했다. "수고하십시오......" 강사범도 순경에게 그렇게 인사를 했다. "콜드게임이군......" 파출소 문을 나서면서 강사범이 중얼거렸다. "그래요, 콜드게임이에요." 상미도 밝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정말이야?" "뭐가요?" "아까 그 전화말이야. 정말 변호사가 오는 거야?" "거짓말 같아요?" "응, 난 변호살 한 번도 가까운 데서 본 적이 없어. 정말 오는 거야?" "왜요, 거짓말 같아요. 아, 저기 오는군요......" 상미가 손을 들자 검은 벤쯔 한대가 스르르 그들의 앞에서 멎었다. "어떻게 된 일이요, 아가씨? 회장님이 몹시 걱정을 하시던데......" "잘, 해결됐어요. 콜드게임으루다가요. 참 인사하세요. 제 친구예요......" "강민웁니다."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시내까지 좀 태워다 주겠어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어서 타시죠." "타요, 강자기." "난 여기서 그냥 갔으면 싶어......" "왜요? 타고 나가요......" "그래요, 타시죠." 벤쯔. 말로만 듣고, 눈으로만 보던 차였다. 도장 사장이 타고 다니는 국산차 값과 이 벤쯔의 문 한짝 값이 같다고 하던가? 그래서 보통차들은 이 벤쯔를 길에서 만나면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설설 긴다고 하지 않던가. 벤쯔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그 차값이 하도 엄청나기 때문에 섣불리 접촉사고라도 나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차를 내던지고 도망을 가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벤쯔의 범퍼라도 찌그러뜨리는 사고를 내면 국산 자가용 한 대를 몽땅 팔아도 그 수리비를 댈 수가 없다던가...... 상미는 신이 나서 변호사에게 강사범이 그들과 싸운 얘기를 한참 설명했다. "태권도 육단이라구? 거, 대단하구먼. 학교 다니면서 언제 그렇게 운동을 했소?" "뭐, 틈틈이 했습니다." "허허, 놈들이 임잘 만났었군......" 차는 어느덧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 이쯤에서 세워주세요." 상미가 맑은 음성으로 말했다. "안돼요, 아가씨. 회장님이 모셔 오랬어요." "아이, 잘 해결됐으면 됐잖아요." "글쎄 꼭 모시고 가야 한다니까요." "아이참, 아빠한테 전화하면 안돼요?" "안됩니다. 제가 야단 맞아요. 아버님 성질 아시잖아요." "상미, 나 여기서 내릴께......" 자꾸 불편했다. 강사범은 얼른 그 차에서 내려버리고 싶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어딜?" "아빠한테요......" "싫어, 아직은......" "아니, 자길 아빠한테 소개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빠 있는 데까지만 같이 가자구요. 나 잠깐만 아빠 만나고 오면 되니까 그리구 나서 우리 야구구경 가면 되잖아요, 응?" 상미가 강사범의 팔에 매달리면서 그렇게 응석을 떨었다. 상미, 이쯤에서 날 놔줘. 난 이런 꿈 속에서는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는 놈이야. 상미, 난 그저 현실 속에서 이 두 주먹과 발길로만 살아온 놈이라구. 이렇게 푹신한 시트에 앉아 있으면 내 단단한 뼈들이 노골노골해진단 말이야. 불에 달군 아교처럼 녹아버려. 그럼 난 살 수가 없어. 난 찬바람 속에서, 그래 상미, 네가 꽂아준 그 나무 높이만큼 겨울 칡 덩굴처럼 기어올라가다가 꽝꽝 얼어죽고 말거야. "같이 잠시만 들렸다 가요, 응?" 강사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시만, 아주 잠시만, 네가 살고 있는 그 높은 성을 구경만 하리라. 그리하여, 내가 도저히, 다시 태어나도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높은 성 속에서 네가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물러서리라. 명동에서 차가 멎었다. "여기예요, 이게 우리 아빠 호텔이에요." 차에서 내려서며 상미가 턱으로 한 건물을 가리켰다. 강사범은 고개를 들어 상미가 가리키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20층의 까마득한 높이였다. 그래서 고개를 잔뜩 젖혀서 바라보는 강사범의 눈에 그 건물의 꼭대기는 교회의 첨탑처럼 뾰죽해 보였다. "제가 무슨 과를 다니는지 아세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유리문을 지나 황홀한 색깔의 붉은 카피트가 깔린 호텔로비에 들어서면서 상미가 물었다. "글쎄?" "호텔 경영학과예요. 우리 아빠는 나한테 이 호텔을 물려주고 싶은가 봐요. 남동생이 있는데두요." 그녀가 자랑스러운 웃음을 띠면서 그렇게 말했다. "상미가 이 호텔을 물려받으면 나 현관 수위 좀 시켜줘......" "수위요? 왜 하필이면 수위예요?" "그래야 상미를 가끔 볼 수가 있을 거 아냐." "잔인한 농담이군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빳빳한 흰 칼라가 달린 유니폼을 입은 엘리베이터 걸이 입술만 달싹이며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나 울아빠 잠깐만 만나서 십원치만 야단맞고 올 테니까 맨 꼭대기에 있는 스카이라운지에 가서 쪼끔만 기다리세요......" 엘리베이터는 고속이었다. 쓰윽, 하는 소리와 함께 아차 하면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몸뚱이를 한꺼번에 오층씩 올려놓곤 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상미네의 변호사가 말했다. 상미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몇층이세요?" 하품이 나오는 입을 흰 장갑 낀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엘리베이터 걸이 물었다. "끝까지 올라가 봅시다." 그래, 끝까지 올라가 보는 거다. 이런 엄청나게 높은 건물의 꼭대기에서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구경이나 할까? 어쩌면 거기는 신비한 영화 속에서처럼 신선을 닮은 선남선녀들이 버러지처럼 지상에서 꿈틀대는 인간들의 비참한 불행을 요지경처럼 들여다보고 있을는지 몰라. 문이 열렸다. 부드럽고 기분좋은 공기가, 따뜻하고 고소한 돈 냄새가 사방에서 나고 있었다. 잎사귀가 괴상하게 생긴 녹색 열대 식물들이 새빨간 리본을 달고 라운지 입구에 죽 늘어서 있었다. 강사범은 뚜벅뚜벅 걸어가 제일 구석진 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한 강사범의 두 주먹은 정권으로 쥐어져 두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푸른 유니폼, 무릎 위로 쑥 올라가는 미니스커트를 입어서 조금만 허리를 구부리면 허벅지가 드러나 보이는 흰 스카프와 에이프런을 두른 아가씨가 유리잔에 든 냉수를 탁자 위에 놓으면서 물었다. "독한 걸루 한잔 주십시오." 여자가 조금 웃으면서 다시 물었다. "칵테일이면 스탠드로 가셔야 하는데요." "아뇨, 위스키 스트레이트 따블......" 강사범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 아래에 없는 것이 없고, 또한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서울이 반쪽으로 쪼개져서 흰 속살을 드러낸 사과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움직이는 차들이 마치 손바닥 위의 손금을 따라 움직이는 무당벌레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그 옆으로 가뭄 때 갈라진 논바닥처럼 사방을 찢어진 골목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 길목마다 사람들의 조그만 머리가 물 위에 뜬 개구리 밥 모양으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저 서울에 무엇이 있는가. 침묵과 위선, 돈과 구정물, 법과 질서, 국회와 창녀, 야당과 사꾸라, 불법과 거짓말, 그리고 또 무엇이 없는가, 사랑과 받아들임, 화해와 평등, 용서와 부드러움...... "따블 스트레이트 위스키......" 술잔을 갖다 놓으면서 여자가 또박또박 말했다. "안주는요?" "냉수나 한 사발 더 주죠." 강사범이 거칠게 말했다. "냉수 하나." 여자가 또 그렇게 복창을 하더니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일본놈, 미국사람, 그들이 그 안에서 크게 웃고 떠들고 마시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앉아서 오라지게 호호거리고 있는 여자들은 아, 모두 배달의 자손, 무궁화 삼천리 화려한 강산 속에서 태어난 평화를 사랑하는 대한의 딸들이었다. 강사범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하얀 유리글라스엔 이제 위스키의 그 노리끼한 기름기만이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옆자리의 일본 사람들이 뭐라고 신나는 소리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울컥 비위가 상한 강사범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눈에 사람의 얼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잔뜩 추위에 질린 얼굴이었다. 강사범은 그 얼굴이 처음엔 자신의 모습이 유리창에 비친 것이려니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건 타인의 얼굴이었다. 까마득한 20층 높이의 건물 창 밖에 어째서 사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일까? 그래, 맞아. 저 사람은 빌딩의 유리창을 닦는 사람이야, 한가닥 로프에 몸을 기대고 빌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환하게 창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유리창을 닦는 사람. 그 사람이 추위에 질린 얼굴로 라운지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목숨을 내걸고 한가닥 로프에 매달려서 닦아대고 있는 유리창 안 쪽에서 벌이고 있는 그 매일의 잔치, 날마다의 호사스러움, 그리고 따뜻함일 것이었다. 강사범은 부러운 듯이 라운지 안을 잠시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그 사람의 추운 얼굴에서 자신의 분신을 볼 수 있었다. 추석절이나 대보름날 그리고 크리스마스, 고아원에서 보낸 그 두렵고 추운 나날들, 가정을 가진 아이들이 갖는 축제 때면 담 너머로 그곳을 바라보던 자신의 어린 나날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냐, 나도 저 유리창닦이처럼 추운 곳에서 여길 들여다보고 있어야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강사범은 단 일로라도 더 그 호텔 라운지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강사범은 계단을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기름 걸레로 잘 청소된 계단은 겨울 빙판처럼 깨끗했다. 강사범은 그 높은 건물을 한꺼번에 오층씩 엘리베이터를 타고 껑충껑충 날아 올라간 것을 반성이나 하려는 듯이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빠뜨리지 않고 밟아 내려갔다. 상미야! 강사범은 뛰면서 중얼거렸다. 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어. 내 이 두 주먹과 발로 말이다. 그래서 네가 살고 있는 여기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란다. 아니 내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살고 있는 성(城)의 그 엄청난 높이가 나를 밀어내고 있단다. 상미야. 3. 욕망의 뜨락 명동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돌아온 강사범은 도장에도 들르지 않고 살롱 금자갈로 직행했다. 꼭지가 확 돌 때까지 취하고 싶었다. 맥주 한 병에다가 배갈을 두어 병 섞어가지고 꿀꺽꿀꺽 막걸리처럼 들이키고 싶었다. 살롱 금자갈의 입구에는 빨간등 하나가 켜져 있었고, 이미 큰못시장 니나노 골목은 성장한 아가씨들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와 있었다. 오늘은 쥐포 한 접시에 삼천 원을 받을까, 사천 원을 부를까 하고 바가지 씌울 궁리를 모두 끝내고 이제 꾼들이 골목에 어정댈 때를 기다리고들 있었다. 아저씨, 나 오늘 목욕했어요. 아다라시라구요, 담배 한 대 주실래요? 아저씨, 끝내 줄께 우리집으로 오세요...... 조금 있으면 그런 야한 대화들이 그 골목 안을 시끌시끌하게 만들 것이었다. 잠시 시장 골목 풍경을 바라보다가 강사범은 살롱 금자갈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강사범의 얼굴께로 무엇인가 휙 날아왔다. 강사범은 앗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었다. 째그르르 하고 강사범의 몸 뒤에서 요란하게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거 초저녁부터 왜 이렇게 개판이야." 홀 안으로 들어서면서 강사범이 그렇게 호통을 쳤다. 맨손의 졸병인 <악발이>와 <칠면조>였다. "강형, 못 본 체하구 나가슈!" 칠면조가 눈을 번뜩이면서 다시 말했다. "마담, 여기 술 줄꺼야, 안 줄꺼야?" 강사범은 다시 그렇게 말했다. 장미마담의 표정은 의외로 잔잔했다. "며칠만이세요?" "어디 갔다 왔나?" "네......" "어디?" "심란해서 가을바다 구경하고 왔어요......" "혼자?" "네 혼자서요......" "쓸쓸했겠군......" 강사범은 장미마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검은 드레스, 왼쪽 가슴에 달린 붉은 장미, 세상만사 다 별 볼일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여자,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어 내면서 세파에 시달린 여자, 쓸쓸함과 요염함을 독기처럼 온몸으로 내뿜고 있는 물장사 여자. "마담, 우린 손님 아냐?" 테이블을 쾅쾅 두들기면서 악발이가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어이!" 강사범은 술 한잔을 들이키고 나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오늘 좀 우울한데 조용히 술 좀 마시게 해줄 수 없어?" "강형 왜 이러슈? 이집하고 무슨 케케묵은 인연이라도 있수?" 강사범이 강하게 나가자 칠면조가 좀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나하고 같은 고아원 출신이야, 알았어? 알았으면 내가 술 한잔 낼 테니까 한 번 와장창 먹어 보라구." 얼떨결에 강사범은 그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정말이야 마담?" 악발이가 영 의심스럽다는 어조로 장미마담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래요. 그래서 여기루 장사하러 온 거예요. 그러니까 좀 알아서 해 주세요." "좋소, 뭐 그렇다면 말이유, 그러나 이걸로 끝난 건 아닌 줄 아슈. 이 정도는 예고편으로 알라 그런 말입니다. 오늘은 그저 강사범 얼굴 봐서 그냥 돌아가겠지만 맨손 형님이 나타나면 그땐 본 영화 시작되는 줄 아슈!" 그들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일어섰다. "이봐 칠면조, 가서 맨손에게 여기 장미마담이 내 고아원 동창이라고 말해 두라구 알았어? 여기 와서 할 얘기가 있으면 나한테로 오라고 말 좀 전해줘!" 내친 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강사범은 말했다. "알았수다. 내 꼭 그렇게 전하지요......" 이제 홀 안은 조용해졌다. 어디론가 피해 있던 종업원들이 하나 둘 나타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뭐 별루......" "그동안 재미 좋으셨어요?" "나야 뭐 늘쌍 그 타령이지...... 뭐." "정말 오늘 좀 우울하신 것 같다." "맞아, 죽고 싶어......" "왜요? 그 손이 미운 아가씨 때문이에요?" "차라리 걔가 거지였으면 좋겠어, 아니 포장마차하는 집 딸이었으면 좋겠어." "근데요?" "그만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대단한 집 아가씬가 부죠?" "응, 아주 요란뻑쩍지근해." 그러면서 강사범은 그날 낮에 우이동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장미마담에게 설명했다. "그래서 우울하세요?" "글쎄 그 얘기 그만 하자니까......" "알았어요, 그래서 술 좀 마시겠다, 그거군요. 그러니까 전 대일밴든가요?" "무슨 실패의 말씀을 그렇게 하실까?" "아무래도 좋아요, 내가 오늘 민우씨 기분 풀어드릴 테니까 우리 나이트클럽이나 가요." "나이트?" "그래요, 가서 신나게 춤을 추고 나면 기분이 좀 풀릴 꺼예요......" "좋지......" 강사범은 그렇게 대답하고 남아 있던 술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새벽 세 시 반의 몸부림 나이트클럽. 대충들 늘어져 있었다. 아직도 음악은 꽝꽝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무대에 나가서 춤을 추는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았다. 어깨 너머로 땋은 머리를 풀고, 저의 언니 원피스를 훔쳐 입고 나온 어린 여자들도 있었고, 친구 장가가기 전날 함값 받아서 단체로 몰려온 젊은 총각들, 시골에서 관광차 올라온 여자 계꾼들, 술집 빠순이 꼬셔 가지고 온 중년신사들, 댄서들, 그 모두가 광란의 밤을 지새고 이제 이윽고 새벽이 되자 모두 몸들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탁자에 엎드려서 자는 여자들, 컴컴한 구석 긴의자에 아예 뱃속 편안하게 드러누워서 입고 있던 양복 윗도리를 벗어 얼굴까지 뒤집어 쓰고 자는 사람들, 목이 칼칼하도록 담배만 태우고 있는 짝 못 찾은 여자들, 이젠 맥주고 쥬스고간에 계산 오르는 것은 시키지 않고 맨 얼음냉수만 찾지만 그래도 웨이터 된 도리로 열심히 테이블 사이를 오가는 종업원들...... 그들 모두가 어서어서 통금해제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들 있었다. 강사범과 장미마담도 그들 사이에 끼어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때요, 이제 기분이 좀 풀렸어요?" 귀찮은 듯이 담배 연기를 옆으로 뿜어 내면서 장미마담이 물었다. "글쎄, 좀 그런 거 같은데 말이야, 기분 푸는 김에 아주 끝가지 풀어버립시다. 화끈하게스리 말씀이야......" "글쎄요......" "왜 마음이 안 내켜?" "아니, 그냥요. 근데 그 손이 밉구 엄청난 집의 딸이라는 여자애 어떤 애예요?" 여태, 이 여잔 그걸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강사범은 갑자기 장미마담이 가엾어졌다. "그 아이는 말이야, 우리 하고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아이야. 우리하곤 아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귀여운 여자라구......" "민우씨는 아직 총각인데 왜 그렇게 그애에게 겁을 먹고 있어요? 결혼하면 되잖아요?" "하하, 총각신분이면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 있나?" "그럼요!" "갠 내가 대학생인 줄 안다구. 거기다가 내가 가진 게 뭐가 있나? 빈털터리 태권도 월급 사범일 뿐인데." "그래두." 마침 그때 올드랭사인이라는 라스트 음악이 나왔다. "자, 마지막 곡이에요." 마담이 담배를 비벼끄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갖가지 모습으로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그 올드랭사인을 울릴 때를 여태까지 기다렸다는 듯이 부시시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댄스 플로어로 나왔다. 부드러운 블루스 곡에 따라 강사범과 장미마담은 서로 몸을 바짝 붙이고 스텝을 밟아 나갔다. "민우씨!" "왜?" "나 당신 너무 좋아하나 봐!" 강민우의 귓볼에다 대고 장미마담은 그렇게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었다. 강사범은 그녀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음악이 끝났다.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벌써 택시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떡할까?"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뜨거운 물에 목욕이나 했으면......" 여자는 강사범의 말에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강사범은 여자의 팔을 잡아 택시문을 열었다. "아저씨, 우리 어디 강가의 조용한 여관으로 데려다 주슈!" 운전사에게 그렇게 이르고 강사범은 눈을 감았다. 왜 이럴까? 가슴이 텅빈 기분이었다. 뭐랄까, 허한 가슴 한복판으로 푸른 연기가 술술 새어나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고 돈 잃고 나서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눈을 감고 있으니까 그처럼 떠들썩하던 밤, 나이트클럽의 시끄러움이 찬물 속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상미도, 상미의 미운 손도, 운동도, 고아원의 추운 마룻바닥도, 맨손의 큰 면도칼도, 도장 사장의 냉랭한 눈길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오직 내 옆에 있는 이 장미마담만을 생각하자. "먼저 목욕하세요......" 장미마담의 말에 따라서 강사범은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 온몸을 휩싸고 있던 우울의 먼지들이 욕탕에 붙어 있는 거울에 뿌옇게 서리는 김처럼 모두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욕조에 온 몸을 담근 채로 강사범은 머리에 비누칠을 했다. 손을 갈퀴처럼 오무려서 머리를 긁자 허연 비누거품이 무더기무더기 물 위에 떨어져 내렸다. 옷을 다시 주워 입는다는 것도 귀찮아서 강사범은 큰 수건으로 아랫도리만을 가리고 밖으로 나왔다. "벌써 다 했어요?" "머리 감고 샤워만 간단히 했지." 젖은 머리를 털면서 강사범은 침대 끝머리에 걸터 앉았다. 장미마담의 긴 드레스가 이미 옷걸이에 빨래처럼 걸려 있었다. "목욕 안할꺼야?" 강사범의 물음에 여자를 고개를 가볍게 저어 보였다. "어, 춥다......" 강사범은 이불 한자락을 들치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아, 그런데 이미 장미마담은 한가닥의 옷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딸깍, 불이 꺼졌다. 강사범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껴앉자 여자는 말랑한 스프트 테니스 볼 같은 가슴돌기를 강사범의 가슴에 꽉 붙여왔다. 강사범은 조용히 여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댔다. 그러자 여자는 마치 한 번 빠지면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는 진흙 모래 늪처럼 남자의 입술을 깊이깊이 말아들였다. 강사범의 오른손이 그녀의 등을 훑어 내려가 이윽고 꼬리 등뼈 언저리에 이르자 여자는 온몸을 활처럼 구부리면서 위로 올라왔다. 강사범은 똑바로 반듯이 드러누워서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맡겼다. 파도처럼 일정하게 떨꺽거리는 나무마차 바퀴처럼 규칙적으로 여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짙은 색깔의 어둠이 그들 사이에 빈틈없이 비집고 들어와 있었고, 오직 가쁘게 토해내는 숨소리만이 햇빛을 받아 드러난 먼지들 모양으로 그 좁은 방안을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고마워요......" 이윽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마지막 힘을 쏟아버리고 강사범의 몸에서 마른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면서 장미마담이 말했다. "담배 아직 남았을까?" "제가 찾아보죠......" 강사범의 말에 장미마담은 뿌연 나신을 일으켰다. 어둠속에 드러난 여자의 벗은 몸은 하나의 안개, 하나의 불가사의였다. 담배를 물고 성냥을 그어대자 잠시 불빛 사이에 드러난 장미마담의 얼굴이 여자 특유의 부끄러움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강사범은 볼 수가 있었다. "피곤하지 않으셔요?" 장미마담이 강사범의 벌판 같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아니, 이 정도로 피곤해 가지구 되겠어요?" "이상해요. 나 민우씨만 보고 있으면 나두 언제나 건강하게 팔팔해지는 느낌이에요......" "그거 다행이군. 여자 남자 얼굴 마주 대하고 있으면 피곤해지는 거 그거 아주 곤란한 일이거든......" "그럼 민우씨두 날 만나면 피곤하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물론이야. 여자는 남자에게 있어서 두 가지 종류거든......" "두 가지?" "응, 우선 첫번째는 옷을 입은 여자와 벗은 여자라고 말 할 수가 있어. 그 다음은 만나서 편안한 여자와 피곤한 여자지." "날 만나면 편안하게 해줬잖아." "피, 엉터리. 그럼 그 손이 미운 아가씨는요?" 강사범은 후, 하고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이렇게 옷을 벗고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여자 앞에서 상미의 얘길 꺼내야 하는 건가? 가슴이 답답해 왔다. 물론 당신을 만나고 있으면 편안하다오. 당신은 제 주제가 어떻게 생겨먹었든지간에 호적상의 처녀라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새끼손가락을 한 번 쥐는 데에도 몇 번씩 공을 들여야 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니까 편안한 거라오. 그러나, 그러나 말이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좋아한다는 기준은 마음의 설레임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가령 한 남자가 두 여자 사이에서 자신이 어떤 여자를 더 좋아하는지를 가름하는 정확한 방법이 있다면 그건 지하실 다방에서 오늘은 이 여자 내일은 저 여자를 만나기로 해 놓고, 그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설레고, 얼마나 두근거리는가를 가만히 계산해 보면 저절로 해답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라오. "괜한 걸 물어봤나 보죠?" "아니......" "그럼 왜 대답을 안하세요?" "그렇게 궁금해?" "그래요, 궁금해요......" "마치 깡짜를 하는 것 같군." "허기야 뭐 내가 그런 거 물어 볼 자격이나 있는 여잔가요." "그 애를 생각하고 있으면 말이야......" 담배를 비벼끄고 나서 강사범은 말을 이었다. "온 몸의 피가 한 방울씩 증발해 버리는 느낌이야." "큰일이군요......" "우리 다른 얘기하지." 이제 붕붕거리는 차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거리가 어둠 속으로부터 몸을 일으키고 그 날 하루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상을 향해서 움직여 나갈 것이다. "밥이랑, 빨래랑 그런 건 어떻게 해결해요?"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이 장미마담이 물었다. "밥은 사먹구, 빨래는 내가 해 입지. 물론 겉옷은 세탁소에 신세를 지구 말이야......" "그렇게 살면 몸이 형편 없어져요. 빨리 자리를 잡으셔야 되겠네요." "자리를 잡는다는 게 무슨 뜻이지?" "응, 그러니까 여자하고 살아야 밥도 제대로 먹구, 버는 돈도 남구 그렇다는 얘기죠 뭐." "그런 생각도 가끔 해보긴 해봤지만 나란 놈은 원래 혼자 사는 법에 익숙해 있는 놈이라구. 가끔 어떤 여자와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스러울 때도 있어. 마담은 한 번도 남자하구 같이 살아보지 않았어?" "그런 얘길 듣고 싶으세요?" "아니,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장미마담은 갑자기 얼굴을 강사범의 가슴에 깊이 묻으면서 속삭였다. "나하고 같이 살아요. 빨래도 밥도 내가 다 할 테니까요. 잘 해드릴께요. 그러다가 언제라도 좋은 색시 만나서 결혼하게 되면 깨끗이 놓아 드릴께요......" 강사범은 담배를 태워 물었다. 웬일인지 강사범의 머리 속에서는 군대시절이 생각나고 있었다. 야간보초 근무에서 돌아와 졸병이 끓여주는 고춧가루 탄 라면을 먹던 생각이 났다. 여자하고 같이 산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 석 달 열흘을 같이 벌거벗고 살아도 피곤 때문에 눈이 스르르 감길 때까지 깨소금 같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고참이 돼서 졸병이 떠다주는 세숫물로 세수하고, 졸병이 다둑거려 준 침상에 기어들어가는 그런 편안함에 불과한 것일가? "나하고 같이 살고 싶어?" "그래요, 살고 싶어요." "내가 오케이라고 대답만 하면 되는 건가?" "그럼요, 어렵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어요." "어렵게 생각할 게 하나도 없다......" 강사범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말 같이 보름만 살아볼까? 도대체 남녀가 같이 산다는 것이 어떤 형태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지......" 강사범은 크게 하품을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나아아, 두우울, 세에엣, 강사범은 열 다섯 명의 유단자들을 인솔해서 뛰고 있었다. 구령을 붙이는 그의 얼굴이 땀으로 번지르르하게 얼룩져 있었다. 착착착, 운동화 밑바닥이 아스팔트에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일정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서대동, 서대동 앞으로!" 구보 행렬의 왼쪽 후미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서대동을 향해 강사범이 소리쳤다. 똑같이 발을 맞추어서 4킬로쯤 로드워크를 하다보면 으례 하나 둘쯤 처지는 사람이 있는 법이었다. 그럴 땐 그 사람을 선두로 세워야 한다. 앞에서 씩씩하게 뛰고 있는 사람을 지친 사람이 보고 뛰노라면 더 맥이 빠지게 마련이었다. "선두, 선두, 반보, 반보......" 서대동이 선두로 나서자 강사범은 그렇게 구령을 붙였다. 이제 언덕길이었다. 구보에 약한 사람은 반환점을 저만큼 앞에 두고 아이구, 이제 겨우 반도 못왔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지치는 것이고, 또 언덕이 저만큼 보이면 니미 난 죽어도 더 이상 못뛰겠어, 하고 나자빠지게 마련이었다. "구보간에 노래한다. 노래--는 진짜사나이 노래 시작, 하나 둘 셋 넷." 헉헉 하는 가쁜 숨소리 사이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나오기 시작햇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벽돌 부수는 태권에 살았다. 대련과 대련 속에서 굳어지는 주먹아! 동네깡패 우리 때문에 어깨를 못 편다. "하나아, 둘......" 이젠 내리막길이었다. 말하지않아도 가속도 때문에 걸음이 빨라지게 마련이었다. 저만큼 주먹에 붕대를 감고 섀도복싱을 하며 언덕길을 올라오는 권투클럽의 로드워크팀이 보였다. 건너편 동네에 있는 권투클럽이었지만 강사범은 그쪽의 코치를 잘 알고 있었다. "여, 강사범 웬일이야?" "어, 잘 돼가? 우리 승단대회가 얼마 안 남아서 서키트 중이야." "우리도 내주에 토요권투에 4회전 선수 두 명 나가." "잘해 봐, 초장에 부랄 보이고 드러눕지 말고." "어, 수고." 그렇게 인사를 주고 받으면서 강사범은 일행을 몰고 도장으로 향하는 골목길로 접어 들었다. 강훈련이었다. 승단 심사에 나갈 유단자들은 하루에 네 시간씩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을 시켜야 했다. 한 친구는 돌려차기가 재빠르고, 또 한 친구는 눈이 좋고, 또 하나는 힘이 좋았다. 서대동만이 이렇다 할 주특기가 없었다. 그래도 서대동은 악착같이 승단심사에 나가겠다고 우겼다. 까짓 심사비 몇 푼이나 되느냐는 식이었다. 하기야 한 달에 두 번씩 검은띠를 까맣게 염색하고 또 거기다 <일단, 서대동>이라는 노란 수실로 이름을 써가지고 도복을 말아 어깨에 척 걸치고 다니는, 폼생폼사하는 친구니까 실력은 여하간에 나가 보고 싶을 것이었다. 아침 운동이 끝나 물로 샤워를 하고 트레이닝 옷을 갈아 입는데 서대동이 히죽 웃으면서 들어왔다. "강사범님......" "왜?" "아침 먹고 뭐할꺼유?" "뭐하긴, 한숨 자고 유치반애들 가르쳐야지?" "유치반 애들이야 부사범한테 맡겨도 별탈없는 거 아뉴?" "그야 그렇지만, 월급때가 가까와졌으니까 좀 충실히 해주어야지." "학교나 슬슬 올라갑시다." "학교?" "형 좀 조용히 보자는 사람이 있어요." "좋은 일이야, 나쁜 일이야?" "나쁜 일은 아니예요!" "보자는 사람이 누군데?" "가보면 알아요." 그러고 보니까 학교 앞이 평소와는 달랐다. 책가방 대신 꽃수술이니 나무로 만든 딱딱이니 하는 걸 들고 올라가는 것으로 봐서 아마 체육대회를 하는 거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터수였다. 생각대로였다. 스탠드에 학생들이 쫙 앉아 있었고 색색의 풍선들과 오색 테이프들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강사범과 서대동이 운동장에 이르렀을 때는 막 가장행렬이 시작되고 있었다. 각 대학의 특색을 살려서 의과대학은 흰 가운을 입고 엉성하게 나무로 만든 앰블런스를 가마 모양 메고 들어왔고, 공과대학은 커다란 톱니바퀴를...... 하는 식으로 분장을 하고 총장이 앉아 있는 로열박스를 기준으로 한 바퀴씩 돌고 있었다. 어느 대학에선가 <역사적 여성 고찰론>이라는 팻말을 앞세우고 여장한 남학생들이 쪽찌고 한복입은 분장, 흰저고리 검은 통치마의 30년대식, 투피스에 하이힐 신은 40년대식, 그리고 미니스커드 입고 껌을 짤깍짤깍 씹으며 핸드백을 돌리는 60년대식 하는 방법으로 가장해렬을 해서 운동장을 떠들썩한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다. 가장행렬이 끝나고 틀 좋은 총장과 호국단 사단장의 개회사가 있자 이어서 각 경기가 시작되었다. "날 보자는 사람이 누구야?" "여기서 일분만 기다려요......" 서대동은 그렇게 이르고 뛰어가더니 잠시 후에 트레이닝을 입은 학생 하나를 데려왔다. "형, 인사해요......" "강민웁니다." 강사범은 학생이 내미는 손을 힘차게 잡았다. "잘 오셨습니다. 부탁하겠습니다." "부탁이라니요?" "마라톤 한 번 뛰어 주십시오." "마라톤이요?" "네, 제가 서대동씨에게 들었습니다. 요번에 복학하실라다가 학기가 안 맞아서 등록을 못하셨다면서요? 그러니까 학생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내년 신학기에 등록을 하시면 저와도 알고 지내시게 될 텐데 뭘 그러십니까. 요번에 우리 대학이 종합우승을 다투게 되었는데 마라톤이 점수가 많거든요." "부탁하시는 말씀은 알겠는데요, 제가 학생이 아닌데 어떻게 뜁니까?" "괜찮습니다. 한 대학에서 마라튼 선수를 열 명씩 차출해서 내보내고 있으니까 팔십 명 아닙니까. 집행부에서 일일이 확인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한 번 뛰어 주십시오, 자, 여기 유니폼 있습니다. 백 넘버는 십팔 번입니다. 일팔갑오, 얼마나 끗수가 좋습니까? "그렇지만 난 학생이 아닌데......" "아, 강형 왜 자꾸 그러슈, 학생이 뭐 별게 학생이유? 인생을 배우고 있으면 다 학생이지......" 그러면서 서대동은 벌써 억지로 강사범의 트레이닝을 벗기고 있었다. "아, 알았어. 내가 입을 테니까 가만 좀 있으라구......" "시간 없어요, 벌써 출발선에 모여들 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이라도 든든히 먹어 두는 건데......" "삼일 굶어도 강형 실력이면 문제없어요. 자, 어서요." 참 이거 일이 묘하게 됐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강사범은 출발점으로 가고 있었다. 출발선에서는 이미 80명 가까운 선수들이 제각기 색깔이 다른 유니폼을 입고 모여 있었다. "자, 우리 힘 냅시다." 강사범이 가까이 가자 강사범이 입은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학생 하나가 말했다. 아마 그 친구가 조장인 모양이었다. 깍지낀 손을 뒤집어서 머리 위에 올리고 몸을 비트는 사람, 서로 뒤돌아 서서 팔짱을 끼고 허리를 풀고 있는 친구, 제자리 걸음으로 겅중대는 친구, 머리에 흰띠 질끈 동여매고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친구. 대학응원단 앞에마다 있는 보컬그룹의 전기기타와 드럼 소리가 푸른 초겨울의 하늘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대가 ○○대를 밟아라, 밟아라, 오뉴월에 개구리 밟듯 콱콱 밟아라, 씹어라, ○○대학이 ○○대학을 소주잔에 오징어 씹듯 콱콱 씹어라. 그런 응원가가 어우러지고 있었다. "준비--" 백발이 성성한 노 체육교수가 스타트 권총을 높이 들었다. 순간 갈가마귀 끓듯하던 운동장이 조용해졌다. 강사범은 스타트 자세를 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좋아, 내 인생 언제는 내가 뛰고 싶을 때 뛰었니, 뛰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뛰는 것이, 그것의 남의 길이든 내길이든 뛰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뛰는 것이 내 인생이었는걸...... "땅--" 우르르 선수들이 쏟아져 나갔다. 그러자 일순간 조용하던 운동장 전체가 풀쩍 1센티쯤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모양으로 와글거렸다. 흰색 유니폼을 입은 대학생 그룹이 맹렬히 운동장을 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와 하는 함성이 선두 그룹에게 쏟아졌다. 그 선수들 중의 하나는 자신있다는 듯이 왼손을 번쩍 들어 응원단에게 흔들어 보이는 여유까지 보이고 있었다. 자식, 너희들은 틀렸어. 이건 2백 미터 트렉 달리기가 아니야...... ] 강사범은 후미 그룹에 섞여서 천천히 호흡을 조절해 가면서 선두를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허기사, 전국 체전에서도 반환점까지는 가 가지고 냉큼 택시 타고 운동장에 돌아와서 만장하신 관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입장한 선수도 있는 판이니까...... 운동장을 돌아 내려오자 앞에서 백차 한 대와 사이카 두 대가 에스코트를 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자전거를 탄 응원단이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때부터는 고독함과 인내, 바로 그것이었다. 강사범은 입속으로 군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한계에 이르는 완전무장 구보, 무거운 엠원총을 들고 언덕길을 헐떡거리며 뛰어올라가던 그 극한의 인내. 아침 새벽의 그 검은 길을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하는 노래를 하며 달리던 삭막한 길. 종아리 위쪽이 조금 묵직해 왔다. 몇 킬로 코스의 마라톤인지 물어볼 새도 없었기 때문에 강사범은 쭈르르 달려나가서 선두 그룹에 끼기로 했다. 시간. 인내. 반환점에 이르자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어 주었다. 이제 선두 그룹은 80여 명 중에 여섯이었다. 그들이 운동장 트랙까지 나란히 달려가 마지막 두 바퀴의 피날레에서 결판을 내게 될 것이었다. 이왕이면...... 이등쯤 해주자. 그나저나 왼쪽 허벅지가 이상한 걸. 내가 요새 며칠 동안 주색에 너무 곯았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단 하나의 밑천이라고는 내 이 튼튼한 두 다리와 주먹뿐인데, 아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열차 차장에게 얼음채운 깡맥주를 팔다가 들켜서 그걸 기차 밖으로 내동댕이쳤을 때, 난 그 깡맥주 버킷을 찾기 위해서 십리나 되는 밤길을 뛰어간 일도 있지 않았던가. 그때 내 몸속에는 한 방울의 눈물도 없었다. 있다면 오직 독기뿐...... 그래 독기...... 인내...... 고독...... 운동장 트랙이 보였다. 열광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꿈결처럼 눈 앞에 아른거렸다. 선두는 이제 셋. 여기다. 이게 막판이다. 입을 꽉 다물고 트랙을 질주하던 강사범의 왼쪽 허벅지가 갑자기 돌처럼 딴딴해졌다. 쥐, 고양이도 무서워 않는 근육의 갑작스런 수축. 강사범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어머 하고 여학생들이 안타까운 듯이 소리를 쳤다. "기운 내세요. 이제 한 바퀴예요. 한 바퀴!" 어떤 여학생이 강사범의 볼을 두드리면서 그렇게 소리쳤다. 강사범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미? 아냐, 상미가 아니군, 만일 이 애가 상미라면? 그래 내가 상미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일 순 없어, 암, 없구 말구! 강사범은 이를 악물고 일어나면서 손톱으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리고 나서 겅중거리면서 뛰었다. 일등은 저만큼, 그래, 일등은 틀렸지만 어디 내 뒤를 보자, 저 친구 이제 들어오는군, 내가 포복으로 기어가도 이등은 하겠군, 좋아, 이등이라도 해주자. 강사범은 그렇게 결심하고 뛰기 시작했다. 한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흰 붕대가 일직선으로 가로 놓여 있는 골인 지점을 향해 그는 반은 깽깽발로 뛰었다. 골인. 이등...... 박수가 강사범의 그 결의에 찬 인내 위에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저녁에 파티가 열렸다. "자, 다시 한번 오늘의 영웅, 강민우씨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사회자의 말에 모두들 따그르르 손뼉을 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제 잔 한잔 받으슈." 아침에 강사범에게 마라톤을 부탁하던 법학과 2학년 김달규였다. 그가 내미는 잔은 술잔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밥공기로 쓰기 위한 두꺼운 스테인레스 그릇이었다. 온몸이 쭈그러진 밀감처럼 상처투성이인 커다란 주전자 꼭지에서 막걸리가 콸콸 부어지고 있었다. "오늘 우리를 끝내주신 강민우씨를 잠시 소개합니다.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기 뜻한 바 있어, 에 또 무엇을 뜻하였는지는 본인도 아직 금시초문이라 잘 알 수가 없으나 좌우지간, 동서남북, 용코칠띠, 앗사야로, 쿤타킨테, 치킨조지로 끝내주는 싸나이 중의 싸나이 올시다. 법학과에 입학하여 오늘의 이 부조리, 내일의 저 부조리를 해결하고 아울러 더 한걸음 나아가 옥중에서 신음하고 있는 춘향이의 정조를 구출하기 위하여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추운 겨울에도 사시공부를 하다가 국가의 부름을 받아......" "어이, 사회자 긴급동의 있습니다." 좌석 저 끝에 자리잡고 있던 안경낀 얌전한 학생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뭡니까?" "그 양반 입학년도가 어떻게 되우?" 강민우는 가슴이 찔끔했다. "어이, 지금 그런 거 따져가지구 선후배 찾겠다는 거야 뭐야?" "형, 지금부터 야자타임이유?" "거 잔소리 빼구 노래나 한 마디 시켜야지 사회자가 뭐하는 거야? 통일주체대의원 입후보했나? 말만 하지 말고 노래하자구......" 술들이 그렇게 몇 잔씩 돌아가자 테이블을 몇 개씩 이어만든 그 자리는 순식간에 시끌벅쩍해졌다. "예, 사회는 이것으로서 지금부터 이 술자리가 개판, 아니 실례, 도그테이블이 된 것을 선언하고 마지막으로 강민우씨에게 노래 한 마디 청해 올리고 본인도 이제부터 술 꺾겠습니다." 다시 박수가 딱딱 쳐지고, 야호, 신난다, 진작에...... 그런 짧은 말들이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강사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노래 일발 장진!" "발사!" 군대식으로 그런 신호가 터져 나왔지만 강사범은 얼른 노래가 생각나지 않았다.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엽전 열 닷 냥." 그런 합창이 시작되었다. --바닷가 모래밭에 손가락 들고,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가슴과 배 그리고 배꼽가지 그렸지만은...... 마지막 한 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뭐뭐-- 군대에서 배운 노래였다. 야호, 기차다, 기차, 어머 밝혀, 발음 똑똑히 허쇼, 남자가 뭐뭐가 뭐요, 화끈하게 허쇼, 그게 뭐 나쁜 말인가, 사람 신체 명칭의 일종인데...... 이젠 그들의 차지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노래가 합창으로 시작되었다. 두만강 푸른물에서 목포의 눈물을 건너 서귀포라 내사랑까지, 그리하여 나는야 홍콩의 꽃 파는 아가씨로 노래가 껑충 산과 바다를 건너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유를 했다가 낙동강 강바람으로 휘돌아 들더니 선구자로 말 타고 강가로 달리다가 우리는 정의파다 와ㅆ와ㅆ까지 나오기 시작햇다. 담재연기가 색칠한 안개처럼 술집 안에 가득히 피어 올랐고, 젓가락들이 모질게 상모서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열기였다. 가슴 안에서 타오르는 그들의 분노와 슬픔, 몸 전체에서 풍기는 노여움과 인내, 죽어버리고 싶은 절망과 열망...... 그 모두가 그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융화되어 시대(時代)의 진공 속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강사범은 문득 그 속에서 그들과 같이 젓가락을 두들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몸을 떨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허위의 그늘에 가려진 진실을 낱낱이 반짝이는 눈으로 꿰뚫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가? 어째서 그들은 노래하는가? --이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은 무엇이뇨-- 누군가가 그 노래를 시작하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젓가락을 두들기던 손을 놓았다. 강사범은 더 이상 그들과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자신의 처지가 새삼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옆자리의 서대동이 술잔을 든 채로 그렇게 물었다. "화장실......" "그럼요, 개인의 이익은 사회에다 환원해야죠. 난 술을 쬐끔 먹기 위해서 거기 안갈랍니다." "왜?" "버리지 않아야 남는 게 있으니까요." 강사범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의자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별이 총총했다. 은하수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미 서울의 밤엔 은하수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듯했다. 자동차의 배기 가스와 오물냄새와, 공장굴뚝에서 구름처럼 쏟아져 나오는 공해를 견디는 별만이 저렇게 살아 남아 있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서울이 만들어 내는 그 악마구리 같은 탁한 공기에 시들고 찌들어서 이제 그만 은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마음 약한 별들만이 이 지구 가까이에서 저렇게 반짝이고 있는 것일까? 피곤했다. 딱딱한 군용 침대일망정 얼른 드러눕고 싶었다. 장미마담도, 상미도 모두모두 잊어버리고 몸 안에 한올의 잠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푹 자고 싶었다. 이층 도장으로 통하는 계단이 짐승처럼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세 개쯤인가 계단을 지친 걸음으로 올라가다가 강사범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찌르르한 살기가 온몸으로 번져 오는 걸 느끼면서 강사범은 몸 자세를 낮추었다. 그 검은 계단 어디선가 화살처럼 각구목이 자신의 뒤통수를 향해서 내리쳐질 것만 같았다. 팽팽히 전신을 긴장시키면서 강사범은 오른팔을 들어 상단막기 자세를 취했다. "역시!" 계단의 위쪽 끝에서 그렇게 짧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범답군!" "누구냐?" "나?" 상대방은 그러면서 딸깍 가스라이터를 켰다. 파르르 피어오르는 가스라이터의 불빛에 반짝 초생달처럼 독이 잔뜩 오른 큰 면도칼이 반짝이고 있었다. "맨손?" "아는군......" "뭐하는 거야 거기서......" "보면 몰라?" 상대방과의 거리가 대여섯 걸음 떨어져 있음을 간파한 강사범은 그제서야 자세를 바꾸었다. "변소가 없어서 여기까지 왔어?" 강사범은 슬쩍 느물거렸다. "웃기지 마......" 컴컴했기 때문에 강사범은 맨손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싸움의 오랜 경험으로 보아 그가 미련한 돼지새끼처럼 계단에서 굴러내려와 칼을 휘두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사범은 알고 있었다. "뭐야, 남의 영업장소에 와서......" "영업장소?" "그래......" "좋아, 말씀 한번 쌈빡하게 꺼내셨어, 좋아 좋다구, 여긴 강사범이 밥을 빌어먹는 영업장소지......" "그래서?" "큰못시장은 내 영업장소야......" "계속해 봐!" "장미마담을 구워 먹든지 삶아 먹든지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야. 나 이미 그런 치들한텐 임질밖에 얻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말 좀 세탁해서 할 수 없어?" "이러지 마. 강사범이나 나나 본바닥은 같은 놈이야. 그렇게 고상한 척한다고 해서 코딱지가 살이 될 것 같아?" "용건만 말해" "용건은 이미 말했잖아. 우리애들 영업하는데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그러지 않겠다면 나도 당신 영업을 방해하는 수 밖에 없지 않겠어?" "그게 될까?" "흥, 안될 것도 없지. 애들 시켜서 맨날 도장 유리창 한 장씩만 깨도 당신 도장 사장이 꽤 좋아할걸?" "금자갈 살롱 장미마담은 나하고 같은 고아원 출신이야." "쌩까지 마. 다 알아봤어, 전에 얼굴마담으로 있던 술집에까지 애들 보내서 말이야. 난 이 정도로 강사범하구 좋게 지낼라구 신경쓴다구." "하옇든 거기선 세금 못 받아!" "왜 걔가 그렇게 맛이 좋든?" "이새끼!" "아, 좋아, 좋아, 어차피 너하고 결판을 내야 이 바닥이 조용해질 테니까 말이야. 어때, 모가지 걸고 한 번 해 보겠어?" "니가 그런다고 내가 겁먹을 것 같애?" "좋아, 좋다구." "어떻게 할꺼야?" "다시 붙어 봐야지......" "또 그놈의 수염 깎는 칼 들고 올꺼니?" "아냐, 생각해 둔 게 있어......" "좋아, 네가 원하는 방법대로 해줄께." 다시 딸깍, 하고 가스라이터가 켜졌다. 그가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비켜서! 날짜와 장소와 방법은 내일쯤 연락할께......"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연한 분홍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강사범은 다시 계단을 내려와 입구로 나왔다. "꿈, 잘꾸라구......" 맨손은 그렇게 빙글거리면서 흔들흔들 큰못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도장으로 올라간 강사범은 모든 스위치를 눌러 불을 환하게 켰다. <체력은 국력> 검은 붓글씨로 씌어진 현판의 유리가 냉랭하게 형광등 불빛을 받고 있었다. 외롭군. 그렇게 혼잣소리로 중얼거리다가 강사범은 쓰게 웃었다. 새삼스럽게 외롭다니...... 상미네의 그 까마득한 빌딩 게단을 뛰어 내려오면서 난 결국 이 세상엔 나 혼자일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강사범은 도장 한쪽 구석에 있는 내실로 들어가서 담요와 더블백을 꺼냈다. 더블백 하나면 이 세상 천지 어디로도 갈 수 있잖니? 그러나 그건 패하는 거야, 세상과의 싸움에서 져버리는 거지. 강사범은 불을 끄고 담요를 푹 뒤집어 썼다. 4. 공주와 경비대장 다음날 아침의 로드워크를 끝내고 돌아와보니까 맨손이 보낸 쪽지가 있었다. "뭐유?" "맨손" "뭔데유?" "한판 붙자는 얘기야......" "아니 그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왜 또 시비야, 시비가." "금자갈 때문이야......" "맞아. 그럴 꺼유,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뭐냐, 꼭 거기서도 영업비를 받아내야겠다, 그 말이유?" "그런 거지." "그럼 이게 도전장이네." "말하자면 그렇지......" "어디 좀 봅시다." 서대동이 괘씸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쪽지를 읽어나갔다. "아이구, 강형. 이새끼가 헷가닥 돌았는가 봐요, 이거 좀 보세요......" 강사범도 서대동이 내미는 쪽지를 받아 읽어 내려갔다. "웃기는군." "정말예요. 웃기는 놈이에요." 강사범은 잠시 쪽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시간은 삼일 후 새벽 다섯 시 정각. 장소는 제일 한강교 나간 위. 방법은 둘이서 줄다리기.> 맨손이 보낸 쪽지에는 그렇게 싸우는 시간과 장소, 방법이 간단 명료하게 씌어 있었다. "강형, 아니 강사범님. 맨손인가 육손인가 하는 그 친구 그거 정신병원 출신 아뉴? 아침에 일어나서 햇님 보고도 벙긋 웃고 저녁에 달님 보고도 감자 먹이는 알딸딸한 놈 아니냐구요. 그렇지 않고서야 싱글매치 붙는 장소를 제일 한강교 난간 위로 할 리가 없잖아요?" "맨손에 대해선 나만큼이나 잘 알면서 그래......" 서대동은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그 쪽지를 우기작우기작 구기면서 말했다. "알았다!" "뭘?" "그 친구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그 이유가 일초전에 생각났단 말입니다." "그래, 뭔데?" 서대동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말입니다. 그 친구가 다분히 유행가를 좋아하는 증거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유행가?" "자, 잘 생각해 보세요. 우선 요새 이런 노래가 있잖아요. 새벽비가 주룩주룩 쿵짜라 쿵짜 하는 노래가 있죠. 그게 싸움시간을 정한 기본적인 요인의 첫째 요소가 됐을 겁니다. 그리구 두 번째 강물은 흘러흘러 갑니다. 아, 제삼한강교 밑을 하는 노래가 장소를 구성한 기본이 되겠구요, 또 줄다리기라는 노래도 있어요, 그러니까 틀림없이...... " "이건 농담이 아냐." 중간중간에 디스코까지 곁들여 가면서 수다를 떠는 서대동에게 강사범은 잘라 말했다. "미안해 강형, 그래 어쩔거유?" 강사범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시간은 까짓 새벽이건 오밤중이건 별로 개의할 바가 아니었다. 문제는 결투의 장소와 방법에 놈이 노리는 계산과 비밀이 숨어 있는 셈이었다. 장소를 백사장도, 운동장도, 부서진 교회터도 아닌 제일한강교의 난간 위로 정한 것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개적인 대결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과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목숨을 각오해야 한다는 공갈도 숨어 있는 셈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난 아무래도 장난 같은 생각만 드는데요." "이걸 봐." 강사범은 서대동의 앞에 벌레가 기어간 것 같은 칼자국이 있는 왼쪽팔뚝을 내밀어 보였다. 그제서야 서대동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강사범님 수영 잘합니까?" "수영?" "아, 난간 위에서 둘이서 줄다리기를 한다면 어떤 쪽이든 한쪽은 강물에 첨벙 떨어질 거 아닙니까......" "군대 안갔다 왔지?" "전 방위소집 대상자예요." "군대에 가면 유격훈련을 받거든. 영화에서도 자주 나오지만 도르래를 쭉 타고 내려가다가 텀벙 물속에 빠지는 거, 그거 여름, 겨울 가려서 하는 게 아니라구......" "그래도 위험하긴 위험하죠?" "물론이지." "지금은 겨울이니까 미리 아스피린을 먹어두어야 하겠네요......" 싸움에 대비한 별다른 준비는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문제는 정말 맨손 그 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강사범은 차분하게 자신의 일상을 되풀이해 나갔다. 운동을 가르치고, 로드워크를 하고 승단대회에 나갈 사람들의 주특기 개발에 열중했다. 오히려 궁금해 하고 열이 난 듯이 보이는 사람은 서대동이었다. --강형, 그놈 혹시 서커스단 출신 아니랍니까?--그런 기발한 생각을 해내는가 하면 --백곰대학이랑 큰못시장에 소문이 짜하게 났습디다. 아마 구경꾼들이 까맣게 몰려들 거유. 그놈이 동네방네 나발을 불고 다니는 모양 같습디다 그렇게 정보를 전하는가 하면...... --거, 저녁에 한 시간씩이라도 연습을 해 두슈. 내가 응원단을 만들어서 강형 일원어치도 기죽지 않게 할 테니까 말이유. 장미마담도 응원 나온다구 했어요-- 그런 식으로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그러나 강사범은 차분히, 물속의 앙금처럼 조용히 가라앉은 상태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루하루 찬찬히 해나갈 뿐이었다. 이제 내일 새벽으로 결투의 날짜가 성큼 다가서 있었다. 그 날 점심때였다. "강형, 강형!" 서대동이 요란스럽게 도장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왜 무슨 큰일이라도 났어?" "왜 무슨 큰일이라는 거 나봤자 뭐 별거 있겠수, 강사범님 스타됐습니다, 스타......" "그게 무슨 소리야?" 서대동은 대답 대신 강사범 앞에 신문을 내밀었다. 주 일회씩 발간되는 백곰대학의 신문이었다. 그 일면에 강사범 그가 테이프를 끊고 골인하는 장면이 선명한 사진으로 나와 있었다. --추계 체육대회 성료-- 저번에 있었던 체육대회에 관한 뉴스가 일면 머리기사로 실려 있었고, 거기에 자신이 출전했던 마라톤 골인 장면이 화보로 실려 있었던 것이다. "사진 기자가 사람 잘못봤군......" "잘못 보기는요, 봐도 아주 에이급으로 잘 봤지요." "시시한 소리 집어치우고 짜장곱배기나 먹으러 가라구." "아이구, 그놈의 짜장곱배기." "저두 짜장곱배기 좀 사 주실래요?" 그들의 말 끝에 난데없이 그런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사범과 서대동은 동시에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서대동이 그렇게 짧은 감탄사를 발했다. 상미, 그녀였다. "여긴 말 타는 곳이 아닌데......" 서대동이 가만 있지를 못하고 또 한 마디 했다. 상미 그녀는 찢어질 듯 팽팽한 골덴 밤색바지를 입고 무릎 밑에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고 있었다. 거기다가 차양이 짧고 모양이 둥근 깜장모자와 긴 채찍이라도 턱 들고 있으면 틀림없이 마장(馬場)에서 막 나온 기수의 폼 그대로였다. 그것은 참으로 또르르 아침 이슬을 털고 나온 듯한 신선한 아름다움이었다, 강사범은 그녀를 보는 순간 온몸에 50볼트의 전기가 통한 것처럼, 전신이 딱딱한 나무처럼 굳어졌다. "안녕하세요? 강자기씨?" 그녀가 고개를 까딱이며 그렇게 말했을 때야 비로소 강사범은 "아, 네, 별고 없으십니까?" 하고 우물우물 입을 열 수가 있었다. "아주,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신지요, 하는 식으로 클래식하게 나가시지 그러십니까?" 서대동이 아직도 마른 찐빵처럼 굳어 있는 강사범의 옆구리를 쿡쿡 치면서 이죽거렸다. "짜장곱배기 안 사주실 거예요?" 상미가 다시 반짝이는 흰 이를 내보이고 웃으면서 싱그럽게 말했다. "가지, 가자구......" 새삼 생각났다는 듯이 강사범은 그렇게 말했다. 짜장면을 먹고 코피를 한잔 마시고 강형, 저 먼저 실례 허것시유, 서대동은 그렇게 말하고 둘 사이에서 사라졌다. "오늘 바쁘세요?" 다방을 나서면서 그제서야 좀 굳은 낯빛이 되어 상미가 물었다. "아직 내 경비대장이라는 생각 변하지 않았나요?" 왼쪽어깨를 조금 찌그리고 걸으면서 상미가 물었다. 강사범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냥 묵묵히 그녀와 보조를 맞추어 걷기만 했다. 차들이 길게 막혀 있었다. 제일한강교 가득히, 그리고 또 로터리와 고가도로 위에까지 버스, 자가용, 짐차, 그런 모든 종류의 차들이 꽉 막힌 사고(思考)처럼 답답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제 이놈의 서울은 온통 차로 뒤덮히리라. 그리하여 길과 차와 경찰서와 호텔과 여관과 산부인과만 남아서 이도시를 쓰레기통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리라. "왜죠?" 상미가 다시 투명한 어조로 물었다. 그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가를 강사범은 잠시 생각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해요." "뭐가?" 처음으로 상미의 말에 강사범은 그렇게 대꾸했다. 아니 그건 상미의 그 신선한 아름다움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래요, 아시다시피 전 부자집 딸이에요, 아니 그래요, 재벌의 딸이에요. 그리구 보시다시피 이렇게 보통 처녀구 건전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가 재벌의 딸이라는 걸 알고난 다음부터는 편견을 가지고 대하려 들거든요. 이상한 식으로 말이죠. 쟨 아마 포장집에 가서 참새 해골 따위는 먹지 못할 것이다. 쟨 아침마다 꿀탄 우유로 목욕을 할 것이다, 쟤네 아버지는 어느 으슥한 농장에다 제 딸만한 세컨드를 키우고 있을 것이다. 쟤네 집에는 식모와 가정부가 밥을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단색적으로 생각해 버리고 말거든요. 그런 편견, 내가 아무리 평범하게 행동해도 그렇게 만장일치로 결의한 다음에 나를 대하는 거예요. 전 그게 싫어요. 전 어릴 때 가난하게 자랐구, 지금도 언제나 마음은 가난해요." 강사범은 역시 아무런 말도 준비할 수가 없었다. 눈물로 찬밥을 먹어보지 못한 아이와 어떻게 가난에 대해서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날, 내가 이 여자네의 그 커다란 빌딩 꼭대기에서 한줄 로프에 매달려 그 안을 바라보고 있는 고층 유리창 닦이에게서 느낀 자화상 같은 저 풀빛나는 두려움을 어떻게 전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강이 보였다. 차들은 아직도 다리 위에서 신경통 걸린 늙은이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저 물로 뛰어들어 버릴까?" 낮으나마 확실한 어조로 강사범이 말했다. 상미가 깊고 서늘하게 쌍꺼풀진 눈을 들어 강사범을 이윽이 바라보았다. "경비대장님!" "네! 말씀만 하십시오." "난 내 경비대장이 이렇게 약한 사낸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약해 가지구 이 공주를 어떻게 보호하겠어요?" "난 다른 곳에선 누구보다도 강하답니다. 내 근육은 철근 같고, 내 마음은 닫힌 솥뚜껑처럼 튼튼하답니다. 그러나 공주님 앞에만 오면 이렇게 소금에 절인 배추잎처럼 힘이 없어지니 어이하면 좋겠나이까!" "기운을 내요, 대장!" "예, 그렇지 않아도 내일 새벽에는 적국의 돌격대장과 이 난간 위에서 일전을 겨루어야 할 중대한 국면에 처해 있는 저에게 힘을 주옵소서 공주님!" "자, 내 손을 잡아요. 그리고 내일의 싸움에 대해서 그대의 결의를 말해 보시오......" 강사범은 조금 허리를 굽힌 자세에서 상미의 손을 잡았다. 상미는 그 예쁜 얼굴을 엄숙하게 찌푸리고 꼿꼿이 선 채로 강사범 앞에 오른손을 길게 뻗어서 내밀고 있었다. 미운 손이라지만 강사범에게 있어서는 더 없이 예쁘고 따뜻한 손이었다. 강사범은 두 손으로 공손히 그녀의 손을 받들어 모신 다음, 그 위에 가벼운 키스를 하며 장중한 어투로 말했다. 마치 결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주군(主君)의 발 아래에 엎드려 출사표를 고하는 것처럼. "이 몸 공주님을 모셔온 지 두 달, 혼신을 바쳤어도 이 몸의 충성을 보이지 못했사온데 감히 큰못시장의 오랑케 맨손이라는 자가 아국의 태평천하를 넘보고 있은 즉, 이제 신명을 바쳐 이내 한 몸을 조국의 산하에 바칠 영광이 당도하였으매 기쁘기 한량이 없사오며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기필고 적장의 목을 한강물에 처박아 넣을 것을 천지신명과 종묘사직에 걸고 맹세하옵는 바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얘기예요? 그럼 장난이 아니라 정말 내일 그 흉악범과 결투를 한단 말이예요?" 상미의 말에 강사범이 설명을 하려는데 러시아워에 막혀 있던 다리 위의 택시 유리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얘들아, 재미있니?" 그제서야 강사범과 상미는 다리 위에 쭉 늘어서 있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맞았다. 어떤 차 안에든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모두 상미와 강사범의 행동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 창피해......" "뛸까?" "좋아요......" 의견일치, 양자합의. --흔들린다 흔들려,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독하게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감태준의 시 <흔들리 때마다 한잔>중의 일절 인용)-- 그들은 차들이 막혀 있는 한강다리를 그렇게 뛰어넘었다. "숨차요, 이제 차를 타요." "차?" "가구 싶은 데가 있어요." 광화문. 동아일보사가 저만큼 있었다. 이순신이 칼을 짚고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저분이 왜 저기 서서 무엇을 지켜보고 있는지 아세요?" "글쎄, 우리나라 역사?" "역사요? 그럴 수도 있겠죠. 우리나라 역사책 중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책이 삼국사기죠 아마. 그러니까 박혁거세가 타조알처럼 큰 알 속에서 태어나고 그의 부인인 알령부인이 용의 갈비뼈 사이에서 태어나던 그런 신화시대의 역사책이 삼국사기인데 거길 두 장만 넘겨보면 일본 놈들이 배를 타고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보여요. 그런 의미에서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고 외치고, 또 잠수함 같은 거북선을 만든 이순신은 위대한 장군이죠, 그러나 지금 저분이 왜 저기 서 있는가 하는 게 제가 물은 거 아니예요?" "잘 모르겠는걸......" "교통순경 돈 떼어먹는 거 감시하는 중이래요......" 그렇게 말하고 상미는 쿡쿡 웃었다. 그녀의 그 산뜻한 웃음으로 하여 강사범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렁이고 있는 우울의 그림자가 갑자기 뜨거운 햇빛을 받아 슬며시 사라지는 듯한 환각을 보는 것 같았다. "가고 싶은 데가 어디지? 극장?" "치, 후지게 무슨 극장이에요. 가봤자 맨날 오밤중에 출근하는 여자라는 거 아니면 호텔에서 나오는 여자, 뭐 말끝마다 여자, 여자하는 영화밖에 더 있어요? 왜들 그러는지 몰라. 제목 끝에다가 여자라는 글자만 붙이면 히트하는 줄 알다니...... 우리 저거 타구 한 바퀴 돌아요......" 상미가 가리키는 곳에서 관광버스 한대가 서 있었다. <민속촌행> 버스였다. 상미는 버스 안에서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학교얘기, 집안얘기, 리포트, 그리고 바보얘기도 했다. "있잖아요. 바보 둘이서 길을 가는데 저만큼 전봇대에 <불조심>이라는 표어가 써 있었대요, 그러니까 한 바보가 너, 저게 무슨 글자인 줄 아니? 그러니까 다른 바보가 그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더니 <전봇대>그랬대요. 그러다가 또 한참 가니까 이번에는 <산불조심>이라는 네 글자가 있어서 또 물어보니까 <또 전봇대> 그랬대요. 또 길을 가다가 <연탄불조심>이라는 다섯자리 글자가 있어서 그런 식으로 바보가 바보에게 물어봤더니 뭐랬는지 아세요? 연탄불조심이라면 글자가 다섯 개 아니예요. 그러니까 바보가 바보에게 <다시 전봇대> 그렇게 다섯자를 맞추어서 말했대요, 우습죠?" "하나도 우스운데......" 강사범은 가끔 그렇게 상미의 재담에 맞장구를 쳤다. 차가 민속촌에 닿았다. "말만 들었지 난 여기 처음인걸......" "전 한두 번 와 봤어요. 있잖아요, 술 좋아하시죠?" "술?" "네, 술이요." "술이라면 내가 끝내주지......" "여기, 아주 끝내주는 술이 있어요. 저기 장터에 가면요, 좀 비싸긴 하지만요......" "이거 만든 사람이 순......" "자, 가요......" 팔랑거리면서 상미가 앞서서 뛰어갔다. 거긴 정말 장터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백 원짜리 동전을 넣으면 돌아가는 30년대의 요지경도 있었고, 어디선가 장타령이 들썩들썩 들려오고 있었다. 머리에 흰 수건 질끈 동여매고 쩔꺽쩔꺽 큰 가위 울리면서 엿먹이는 엿장수도 있었고, 국밥 말아주는 한복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분위기는 장터다왔지만 사람은 뜸했다. "아줌마, 추워요." "그럼 방으로 들어가시구랴." 둘은 콩기름이 잘 발려진 장판방으로 들어갔다. "또 아무 일 없어야 한다구 약속부터 해야하는 거 아냐?" 늦가을 첫비 오던 날의 우이동에서의 일을 생각하며 강사범은 능청을 떨었다. "미워요." 상미가 곱게 눈을 흘겼다. 술이 왔다. 한 장에 천원씩이나 하는 비싼 빈대떡도 나왔다. 간장종지가 예쁘게 생긴 놈이었다. "자--" 강사범은 그녀의 흰 사기잔에다 노란 약주를 따랐다. "우리의 재회를 위해." "내일의 결투를 위해." 술은 아주 달콤했다. "이제 얘기해 보세요." 상미가 거푸 두 잔을 마시고 나서 발그레 상기한 얼굴로 빤히 강민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어?" 장타령의 흥얼거리는 소리가 얇은 창호지 문을 통해 번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 말이나. 그 날 왜 사라졌나 하는 대목부터 시작해 보세요." 강사범의 잔에 오리 모가지 같은 호로술병 목을 잡아 말간 술을 따라주면서 상미가 말했다. 강사범은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좋아, 말해 버리자. 아직 한 번도 내 입에서 새어나가 본 일이 없는 가장 고귀한 그 말을...... 그리하여 내 몸이 유리조각처럼 부서질 때까지 밀고 나가보자. "사랑해......" 강사범은 큰 소리로 불쑥 그렇게 말해 버렸다. 일단 그 말을 입 밖에 내고 보니까 너무 큰 소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부드러운 테너로 크리스마스 이브쯤, 아니면 첫눈 오는 날의 덕수궁 돌담길이나 데이트가 끝나고 그녀의 손에 한 개의 토큰을 건네 주면서 부드럽게부드럽게 이런 말을 하리라고, 하게 되면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슈퍼마켓에서 오렌지쥬스 한 통 집어들고 얼마요, 하고 물어보는 식으로 이렇게 투박하게 이 고상한 말을 내뱉고 말다니...... 상미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사랑해, 널 사랑한다구......" 이왕에 내친 김이다 싶어서 강사범은 다시 또 한번 그렇게 큰 소리로 말했다. 상미는 그냥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상미......" 그녀는 그냥 그대로였다. "이봐, 상미, 내 공주님." 그러자 상미의 고개는 더욱 밑으로 떨어졌다. 마치 그 흰 목덜미를 자라처럼 여린 몸통 속으로 숨겨 버리기라도 할 듯이 그녀의 고개는 어깨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강사범은 몸을 일으켜서 그녀의 옆으로 가 앉았다. "미안해 상미, 놀라게 했다면 내가 사과하지......" 오른팔로 상미의 어깨를 쓸어안으면서 강사범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상미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아, 그녀의 눈가엔 반짝이는 눈물방울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화난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허지만 용서하겠어요. 그말, 제가 이렇게 커다란 남자한테 난생 처음 듣는 말이니까요." 상미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강사범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바보." 강사범은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 앞으로 혀를 일 센티쯤 내밀어 그녀의 두 눈가에 있는 눈물방울을 빨아들였다. 그러자 그녀의 따끈한 볼이 강사범의 입술 앞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천천히 강사범은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비벼갔다. 젖은 꽈리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부드럽고 축축한 그녀의 혀가 강사범의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밀물처럼, 썰물처럼, 그들의 키스는 이어졌다. 그녀의 어깨를 싸안고 있던 강사범의 오른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검은 슈츠 밑에 있는 블라우스는 그 현란한 붉은 색깔에 비해서는 아주 얇은 것이었다. 강사범이 손을 조금 올리자 거기 그녀의 앞가슴에 당당한게 돌기한 두 개의 유방을 감싸고 있는 브래지어의 끈이 만져졌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왜?" "너무 밝아요." 젖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 말에 강사범은 그녀를 풀어주었다. 내 귀여운 사슴아, 난 너를 해칠 포수가 아니란다. "말을 타고 싶어요." "말?" "응, 쪼끔 내려가면 말이 있어요." "말을 탈 줄 알아?" "탈 줄은 모르지만 말을 타고 저기 하늘에 있는 구름 위에까지 날아 올라가고 싶어요......" "탈 줄 모르면 구름은 커녕 땅에 떨어질텐데......" "내일 어떡하실래요?" "싸움?" "네......" "해야지......" "왜요?" "말할 수 없어......" "좋아요, 그러시담 전 오늘 저녁 내내 자기 옆에 있을래요......" "그래도 돼?" "내일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바보, 안 죽어. 상미 때문에라도 못 죽겠어. 자 일어서. 내가 가서 말을 태워줄께......" 강사범은 그렇게 말하면서 상미를 번쩍 안아 일으켰다. 붉은 바다가 있었다. 입속에서 굴리다가 토해내는 빨간 사탕알 같은 해가 그 붉은바다 여기저기서 솟아 오르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막막한 붉은바다였다. 강민우(姜民雨)는 그 붉은바다 한가운데에 있었다. 강민우가 타고 있는 배는 조그만 보트였다. 보트 한가운데 구멍이 뚫려 핏빛 같은 바닷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가라앉는다. 가라앉는다. 강민우는 그런 절박한 다급함에 쩔쩔매고 있는데 저만큼 앞에서 부르르릉 하는 엔진 소리와 함께 날아갈 듯이 뱃머리를 곤두세우고 모터보트 한 척이 지나가고 있었다. 수면을 차고 발딱 곤두서서 쾌속으로 움직이는 모터보트 위에는 긴머리를 휘날리는 여자 하나가 타고 있었다. 전상미(全常美). 상미야 상미야, 날 구해줘...... 강민우는 목청껏 그렇게 소리쳤다. 이미 붉은 바닷물이 강민우의 복사뼈 근처에까지 밀려와 넘실대고 있었다. 그러나 상미가 탄 모터보트는 강민우를 보지 못한 모양으로 계속 저만큼 달아나고 있었다. 상미야. 상미! 강민우는 벌떡 일어나면서 그렇게 소리쳤다. 꿈. 꿈이었다. 지랄 같은 꿈이군...... 강사범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시계를 보았다. 네 시였다. 새벽이라고는 하지만 어디 한군데에서도 빛은 보이지 않았다. 샤워실로 가서 강사범은 찬 물을 틀어놓고 그 밑에 머리를 통째로 디밀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통에 쏟아지자 금새 전신이 쩌르르 저려왔다. 역시...... 강사범은 상미를 집으로 들여 보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민속촌에 가서 그렇게도 날카로운 키스를 하고, 푸푸 흰 콧김을 내뿜는 말을 타고, 서울로 돌아와 이윽고 밤이 되자 상미는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강자기, 도자기. 나 집에 안갈 테야. 자기가 내일 깨끗하지도 않은 한강물에 첨벙 떨어져 죽을지도 모르는데 오늘 나 보고 집에 가란 말이야?-- 그렇게 어거지를 피우는 상미를 강사범은 별 말을 다해서 달래야 했다. --상미, 잘 들어요. 남자는 말이야 자기가 진정으로 아끼는 보석에는 흠집을 내려고 하지 않는 법이에요.-- --싫어, 싫어, 흠집이 나도 좋고 금이 가서 깨져도 좋아요.-- 그러나 결국 강민우는 상미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왜 욕심이 나지 않았겠느냐만은 정말 강민우는 상미만큼은 그냥 그렇게 쓸쓸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도의 거리에 놓아 두고 싶었던 것이다. 강민우가 그 차가운 물 밑에서 얼굴을 들고 수건을 양손에 팽팽하게 말아쥐고 툴툴 젖은 머리를 털고 있는데 시끌벅쩍하는 소리화 함께 사람들이 들어섰다. 서대동, 김달규 그리고 에그머니나, 장미마담까지 거기 나타나고 있었다. "웬일들이야?" "응원단 아닙니까? 자고이래로 모든 싸움에는 홈그라운드의 잇점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사실적으로 따져보면 다 응원하고 연관이 있는 얘기예요. 안 그렀습니까?" 응원단까지도...... 그러나 그들의 성의가 괘씸하고, 이런저런 말씨름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갑시다." 그들은 나와서 택시를 탔다. 한강은 거기서 금방이었다. 이미 맨손, 구두, 칠면조, 악발이 등 맨손의 일당들이 거기 나와 있었다. 기세를 올릴 참인지 맨손의 꼬붕인 칠면조는 소주병을 통째로 거꾸로 들고 나발을 불어대고 있었다. "자, 시작할까?" 맨손이 성큼 난간 위로 올라서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의 손에는 3미터쯤 되는 밧줄이 들려 있었다. 강사범도 가볍게 난간 위로 올라갔다. 그 난간은 활처럼 휘어진 쇠빔과 쇠빔 사이에 5미터쯤의 길이로 있었고, 양발 사이를 10센티쯤 벌리고 한 사람이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넓이가 있었다. "기권해도 좋아!" 맨손이 강민우에게 밧줄의 한쪽 끝을 던지고는 징그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천만에......" 날카로운 바람소리 속에서 강민우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좋아......" S자로 밧줄을 허리에 감으면서 맨손도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요이!" 서대동이 손을 높이 들었다. "세컨아웃!" 신새벽에 소주 먹고 취한 칠면조가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렇게 소리쳤다. 강사범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밧줄 끝을 잡은 오른손과 허리 앞에 있는 밧줄을 잡은 왼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스펜서 트레이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산>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거기서 밑으로 떨어지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밧줄을 잡은 손에 힘을 주던 주인공, 밧줄에 매달려서 천야만야한 절벽으로 떨어진 동생, 침묵 속에 싸인 흰 만년설(萬年雪) 위에 밧줄을 쥔 손이 쓸리는 바람에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 "시이......" "작!" 신호가 있기 전에 이미 팽팽한 줄다리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강사범은 맨손의 째진 눈가를 한점 흐트러지지 않는 고요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어떤 결정적인 행동을 하려 할 때는 먼저 그 눈동자에 움직임이 나타나는 법이다. 상대는 처음부터 지그시 밧줄을 당기고 있었다. 휘릭휘릭하는 소리를 내면서 차가운 겨울바람이 강사범의 귓가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맨손형, 끝내버려, 끝내!" "강사범 파이팅!" 대단한 힘이다. 강사범의 손 끝에 전해져 오는 상대의 팽팽한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강사범의 이마에도 굵은 핏줄이 돋아 오르고 있었다. 금방 겨드랑이에서 땀이 미끌거리는 것을 강사범은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강사범은 맨손의 눈에서 눈길을 떼 일점(一點)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상대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난간 아래에서 끝내요, 끝내. 죽여라, 뭐 어쩌구 그렇게 응원하려 온 사람들이 악을 쓰는 소리는 강사범의 귀에 한갓 윙윙거리는 날벌레 소리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순간, 강사범은 몸을 낮추었다. 느글거리던 상대의 눈동자가 반짝 살기를 쏘아내었던 것이다. 아, 졌다. 강민우는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바짝 있는 힘을 다해서 S자로 감긴 밧줄에 힘을 주어 자신을 끌어 당기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오산이었다. 뭐랄까, 페널틱 킥을 막아내야 하는 골기퍼가 틀림없이 왼쪽이다, 하는 생각에서 왼쪽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야속하게도 오른쪽으로 떼구르르 볼이 굴러오는 그런 허망함이라고나 할까 . 강민우는 애써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리고 떨어지더라도 다리 위로 떨어져야지......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어느 놈이 KO펀치 맞고 보기 흉하게 만장하신 돈 내고 들어온 관중 앞에서 두 다리 번쩍 들고 보기 흉하게 드러누우며, 어떤 선수가 7회초 만루 역전 챤스에서 삼진 먹고 뒤통수 긁으며 배터박스에서 쥐구멍 찾듯이 덕 아웃으로 뛰어 들어 가겠는가...... 떨어진다, 떨어져...... 강민우의 몸은 겨울허공에 떴다. 강민우는 생각했다. 이건 공수훈련이 아니다. 잡아당길 낙하산 끈도 없이 나는 떨어진다. 호흡을 멈추자. 물에 떨어져서 죽지는 않는다. 수영? 그까짓 것 배가 고플 때까지 물 속에서 놀 자신이 있다. 요는 심장마비다. 놀라서 까무라쳐 죽는 것, 그게 심장마비다. 호흡을 멈추자, 그러면 산다. 한증탕에서 체중 줄이다가 갑자기 냉탕에 텀벙 들어간다고 심장마비가 걸리나. 떨어진다, 떨어져. 당신은 제비처럼 반짝이는 날개를 가졌나, 노래하는 제비처럼. 강민우는 물 속에 쑤셔박혔다. 그리고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하여 일정한 부력에 의하여 서서히 물 위로 다시 떠오를 때까지 강사범은 숨을 쉬지 않았다. 생각보다는 차지 않군. 수면 위로 떠올라 발을 조금씩 움직이며 혁대를 풀면서 강사범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게 다 군대에서 훈련받은 덕분이 아니겠어. 웬일인지 오히려 그렇게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공수부대의 위탁교육을 받을 때,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배낭에 지고 처음으로 허공에 몸을 날릴 때, 조교는 훈병들에게 빠짐없이 물었다. 애인 있나, 네 있습니다. 이름이 뭐야. 네, 영잡니다. 좋아, 크게 애인 이름을 부르면서 뛴다, 자 뛰어. 두 발을 비벼서 물 속에서 운동화를 벗어 버리고, 다시 물 속으로 몸을 가라앉혀서 바지를 벗어버린 다음에 수면위로 올라와서 난간 위를 쳐다보니, 거기는 과시 중국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와시와시하고 있었다. 강사범은 천천히 헤엄을 쳐나갔다. 오히려 강물 속은 바깥보다 따뜻한 것 같았다. 공수부대에 위탁교육을 갔을 때 미군 특전단들의 훈련장면을 본 일이 있었다. 완전무장을 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가다가 그 헬리콥터가 통째로 강물에 가라앉는다. 그때 침착하게 문을 열고, 총을 들고, 5킬로의 배낭을 메고, 워커신은 몸으로 수면 위로 침착하게 떠오르던 그린베레들의 모습. 그때였다. 다다다다 하는 요란한 소리가 헤엄을 치고 있는 강사범의 귓가에 울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 정말 깎아놓은 배쪽같이 날씬한 모터보트 한 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트는 금새 드드, 하고 소리를 죽이면서 헤엄을 치고 있는 강사범 가까이에 멈춰섰다. "이 미련하고 엉터리 같은 깨진 도자기, 강자기야......" 상미, 분명히 상미였다. 상미가 그 모터보트 위에서 그렇게 악을 쓰고 있었다. "이 곰퉁아, 거기서 칵 죽어버려." 상미는 징징 울면서 그렇게 강민우에게 악다구니를 해대고 있었다. "어이, 내 손 좀 잡아줘......" 강민우는 왼손으로 보트를 잡고 오른팔을 내밀면서 외쳤다. "싫어, 거기서 오염된 한강 똥물이나 실컷 먹고 죽어버려. 누가 자기 때문에 첫새벽에 여기까지 보트 세내서 온 줄 알아? 싫어......" 귀여운 상미, 넌 내가 이 강물 속에 가라앉아서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줄 알았지. 그렇지만 그건 천만에 만만에 말씀이야. 그렇게 쉽게 죽을 목숨이면 벌써 죽었게...... 강민우는 두 팔로 보트의 뱃전을 잡고 영차, 힘을 주어서 올라갔다. 배가 휘청했다. 그제서야 민우는 이가 달그락 마주치도록 추워왔다. "춥다, 상미야." "몰라, 몰라." 강민우의 앞에 푹신하고 화려한 담요를 던져 주면서도 상미는 여전히 징징 울고 있었다. "아가씨, 이제 어떡헐까요?" "아랫쪽으로 가세요." 상미가 말했다. "어디루요?" "아마 마포 쪽으로 가자는 모양입니다." 강사범의 설명에 보트는 다시 다다다다 하는 소리를 내면서 한강 한가운데에 흰 물줄기를 남기면서 하류 쪽으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 겨울바람 때문에...... 귓볼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상미와 민우를 실은 모터보트는 한강 하류로...... 쉬지 않고 바다에 이를 기세로 달려 내려갔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덜덜 떨면서 강민우가 큰 소리로 물었다. "아무데라두 가면 어쩔 테야!" 상미는 아직도 뿔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지만 강민우는 추워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시 미적지근한 온기를 지닌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온몸의 땀구멍에서 돋아난 솜털들이 뽀스스하게 일어나 있었고 넓적다리 근처는 얻어맞은 사람처럼 푸르스름한 색깔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독오른 방울뱀모양으로 머리를 바짝 쳐들고 겨울강물 위를 달려가는 모터보트에는 면도날 같은 겨울바람이 화살처럼 무수하게 날아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쯤 내려왔을까...... <매운탕전문>이라는 수상음식점이 보였다. "아저씨 저기에 대주세요. 이거 추워서 못 견디겠습니다." 강민우는 악을 쓰듯 그렇게 큰 소리로 모터보트의 핸들을 잡고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아까부터 그 사내는 상미와 강민우가 무엇이라고 한 마디씩 할 때마다 허파에 바람들린 사람모양으로 빙글빙글 웃고 있더니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보트가 그 수상음식점의 드럼통에 닿자 강민우는 그렇게 간단히 인사치레를 하고 뿌르르 음식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주머니 이 집에 따뜻한 방 있습니까?" 조그마한 홀로 들어서면서 강민우가 허겁지겁 그렇게 말하자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난로 앞에서 역시 그 난로처럼 벌건 색깔의 얼굴을 하고 뜨개질을 하고 있던 사십대의 여자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방 있어요?" 강민우는 그 아주머니가 앉아 있는 난로 가까이에 다가서면서 다시 그렇게 말했다. "아니 이것이 뭔 일이다요?" 그 아주머니는 손을 들어서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하면서 놀란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도 그럴 듯이 뜨거운 여름도 아닌 한겨울에 물방울이 아직도 뚝뚝 떨어지는 수영복을 입고 거기 어울리지 않게 담요를 둘러쓰고 딱딱 이를 마주치면서 자기의 앞에 서 있는 이 덩치 큰 사내가 허깨빈가 귀신 사촌인가, 청량리 뇌병원에서 도망나온 미친놈인가 도대체 어떤 놈인가, 그 아주머니는 얼른 분간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저 아주머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몸 좀 녹이게 따뜻한 방이나 하나 골라주십시오." 강민우가 다시 그렇게 말했지만 아직도 그 주인 아주머니는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아주머니, 그 사람 아주 완전히 헤까닥 간 사람은 아니예요. 제가 책임질께 걱정하지 마세요." 상미가 뒤따라와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아주머니는 무엇인가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인 모양이었다. "자, 여기......" 말로 설명을 하려면 길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인지 상미가 주인 아주머니의 손에 빠닥빠닥 소리가 나는 만 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방이 있기는 하지만서두, 이거 시방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모르것소잉." 아주머니는 정겨운 사투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주방 뒤쪽에 있는 내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탄불을 싸게 열어 놨으니께 따땃하것소, 그나저나......" 아직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벌거벗은 강민우와 예쁜 얼굴의 상미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아주머니는 문을 닫고 나갔다. "아, 춥다. 추워......" 이불 속에 쏙 파고 들어가서 강민우는 자꾸 그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거 갈아 입으세요." 상미는 강민우 앞에 나일론 보자기에 싼 보따리를 하나 던져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민우는 시린 손가락을 비비면서 그 보따리의 매듭을 풀었다. 팬티, 부드러운 솜 같은 흰 순모 내복 아래 위...... 그리고 검은 터틀 셔츠와 트레이닝이 한 벌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젖어서 축축한 수영팬티를 벗어버리고 내복을 입다가 강민우는 울컥 눈물이 솟아올랐다. 순모로 짜여진 그 내복의 기분좋은 부드러움처럼 상미의 고운 마음이 그의 전신을 흔들리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미야......" 강민우는 옷을 다 입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기 상미가 어깨를 옹송그리고 물속에까지 깊이 박힌 말뚝에 기대서서 번들거리는 겨울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긴 머리결 뒤로 물새 몇 마리가 끼륵끼륵 울면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강 저쪽 건너편에는 푸수수 소리를 낼 것 같은 누런 갈대가 마치 물결을 이루는 가을추수 전의 황금들판처럼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상미야!" 강민우는 소리쳐 상미를 불렀다. "옷 다 갈아 입었어요?"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상미가 물었다. "고마와. 이렇게 생각을 해줘서." "고맙다고 말할 필요없어요. 난 민우씨 시체를 건져주려고 나왔었으니까요......" "정말 내가 죽어버릴 줄 알았나 보지, 상미는?"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왜?" "몰라요, 몰라. 그렇게 어리석은 일에 목숨을 걸 수 있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게 화가 나서 죽겠어요." 여전히 화난 얼굴로 상미는 그렇게 말했다. ...... 사랑...... 네가 지금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했니? 요새는 누구든지 너무 쉽게 해버리는 말이라서 오히려 그 말을 어렵게 하는 사람이 바보스러워 보이는, 사랑한다는 말...... 그 엄청난 추상명사를 네가 지금 나에게 썼구나. 뾰루퉁한 얼굴로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상미의 바지 끝에 한 손으로 들어올릴 만한 예쁜 발이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상미, 사랑해. 나두 널 사랑한다구. 이 말을 하구 죽어버리고 싶었어. 외롭고, 서럽고, 딱딱하고, 차가운 죽음앞에 눈 딱 부릅뜨고 마주하고 싶었어, 사랑해." 상미의 조그만 발을 손으로 잡으면서 민우는 말했다. 그녀에게 그렇게 하고 싶었던 그 말 한마디를 하고 나니까 웬일인지 가슴이 싸하니 허전해졌다. 상미가 민우의 손에 잡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화를 내지 마, 이제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일에 네가 사랑하는 내 목숨을 걸지는 않을 테니까......" "정말 약속할 꺼예요?" "아무렴, 약속하구말구......" "정말이죠?" 대답 대신 강사범은 어린 비둘기 같은 상미의 어깨를 품안에 끌어안았다. 접혀지는 새의 날개처럼 그녀의 몸이 아주 작게 민우의 품안에 안겨 들어왔다. 상미의 눈은 조금 감겨져 있었다. 마치 새로 갈아입은 부드러운 흰 내복처럼 따스한 상미의 입술이 잘 익은 으름열매처럼 강민우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민우는 그런 상미의 입술을 벌리게 하고 고개를 약간 옆으로 하여 그녀의 잇사이를 열었다. 달고 촉촉한 그녀의 가장 부드러운 몸이 강사범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빨간 딸기의 돌기 같은 그 바닥을 민우는 하나씩 살피고 있었다. 상미가 그의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소리없이 허물어지는 상미의 몸을 민우는 오른손으로 찾아 들어갔다. 허리 뒤에 삐죽 나와 있는 두꺼운 털스웨터 자락을 헤치고 민우의 손이 그녀의 등어리로 올라갔다.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면 주르르 미끄러져 내릴 것같이 매끄러운 그녀의 잔등. 그 한가운데에 작은 끈이 있었다. 강민우는 입안 가득히 딸려 들어오는 딸기 같은 그녀의 혀를 받으면서 두 손가락을 움직였다. 상미가 몸을 꿈틀했다. 이미 아무런 떨림도 없는 상미의 앞가슴으로 튼튼하고 넙적한 민우의 손이 나아가고 있었다. 거기 백 원에 한 개씩 파는 사과만한 조그마한 젖무덤이 수줍게 민우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가 힘을 주어 그것을 움켜쥐자 상미는 재롱을 부리는 아이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민우는 거기서 중단하지 않았다. 팽팽한 하복부를 꽉 죄고 있는 바지 앞의 호크를 풀었을 때, 이미 상미는 반듯하게 누워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사랑해...... 민우는 뜨거운 입김과 함께 그 말을 그녀의 부드러운 귓볼에 다 쏟아 넣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상미의 바지를 쑥 훑어내렸다. 그러자 거기 사슴처럼 긴다리를 가진 상미의 가는 몸이 한겹으로 나타났다. 민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허물처럼 그녀의 하체를 감싸고 있던 긴 스타킹을 벗어내렸다. ...... 눈...... 그것은 마치 신선한 눈이었다.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빈 운동장에 가득히 쌓여 있는 눈 그 위를 민우는 천천히 밟아 나갔다. 상미는 눈을 꼭 감고 거기 민우의 발자국이 하나씩 찍혀 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 아...... 민우가 그녀의 몸 가운데 가장 깊숙하게 숨겨져 있던 부분에 닿자 상미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렇게 짧은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상미는 더 크게, 더 아프게 강사범의 목을 꽉 잡았다. 뜨거운 민우와 상미의 짧은 탄성이 윙윙거리는 겨울바람 소리처럼 방안 가득히 물결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윽고 강사범이 그녀의 몸 위에서 한 줌의 그림자처럼 떨어져 나왔을 때 상미는 쿨쩍쿨쩍 울기 시작했다. "왜?" "이게 뭐야 이게......" 간간이 울음 끝에 상미가 그렇게 토막토막 말했다. "슬퍼서?" "아니 슬픈 건 아니지만......" "그럼 왜? 부끄러워서?" "몰라, 몰라, 이런 데서 이렇게 부서지는 게 아니었는데." "부서지다니 무슨 소리야, 더 완전하게 된 거지." "싫어, 미워."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미는 민우의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그녀를 꼭 껴안으면서 민우는 말했다. "나두 이럴 작정은 아니었어. 어떻게든지 예쁜 레이스가 달린 흰드레스를 입혀주고, 촛불이 이백 개쯤 켜 있는 바닷가의 깨끗한 호텔시트에서 너를 가지고 싶었어. 왜냐하면 내가 가장 아끼는 보석이었으니까......" "정말?" "그럼 정말이구 말구지......"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 이제라두 말이야......" 민우는 그 방에 있던 재떨이에서 꽁초를 주워 입에 물었다. 어떻게 이 아이에게 설명을 해야 하나...... 지금 여기서 말해 버릴까? 난 대학생도 아니고, 더구나 법대생은 더욱 아니며 단지 월급사범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미에게 꼭 말해줄 게 있어......" "말해, 들을께......" "화내지 않지?" "음, 듣고 나서 생각해 보구......" 민우는 다시 한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5. 갈대가 되고 싶은 나무 상미는 엎드린 자세에서 왼쪽팔에 얼굴을 묻고 강민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하얗고 동그란 어깨 위에 강민우를 향한 그 여자의 미움이, 그 여자의 사랑이 잔잔하게 머물러 있었다. 마치 괴어 있는 물처럼...... "난, 나쁜 놈은 아니야......" 강민우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겨울 강의 수면을 핥고 지나가는 매운 바람소리가 휘파람처럼 그들이 누워있는 수상음식점의 문틈 사이로 새어들고 있었다. "무슨 얘긴데......" 그러면서 상미는 바짝 민우에게로 다가왔다. "그렇게 뜸을 들여요? 혹시......" "혹시?" "결혼하자는 얘기 같은 건 아니겠죠?" "결혼?" 민우는 컬컬 웃었다. 결혼, 그게 혼자하는 건 아니잖니. 더더구나 배짱맞는 남자 친구들끼리 핀으로 새끼손가락 조금 찔러서 빨간피 몇 방울 떨어뜨린 배갈 한잔씩 나누어 먹고 용감하게 의형제 맺듯 그렇게 간단한 것도 아니구 말이야...... "공주하고 흑인 경비대장하구두 결혼 할 수가 있나?" "왜요? 왜 못해요? 공주가 백인이라 아이노꼬 나올가봐 걱정인가요?" 상미가 그렇게 반짝이면서 웃어 보였다. "사실은 말이야...... 난 대학생이 아니야, 법과 대학이라는 건 거짓말이라구. 난 그저 태권도 도장의 월급사범에 불과한 사람이야. 그 날 상미가 백곰대학 근처에 오던 날 있지, 가을 축제 때 말야. 그 날 서대동이라는 친구가 잠시 상미의 파트너가 돼 달라고 말해서 얼떨결에 그랬을 뿐이야. 난 예비고사 치던 날도, 우리 친구들이 대학이라는 그 꿈의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서 예비고사를 치던 날도 맨발에 목쉰 소리로 도장에서 구령을 붙이고 있었어. 물론 그때는 월급도 없는 무급사범이었지만 말이야." 강사범은 단숨에 그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강민우는 자신이 몹시 저주스러웠다. 차라리 민속촌에 같이 갔을 때쯤 그런 말을 해 버렸으면 지금쯤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할까. 이건 마치 처녀를 꿀꺽한 다음에 <난 임자가 있습니다> 하고 오리발을 내미는 바람둥이 유부남과 다른게 없지 않은가 말이다. 상미가 고개를 돌렸다. 다시는 민우를 돌아다보지도 않을 것같이 찬바람이 휙 도는 모습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상미는 가는 두 팔을 엑스자로 포개더니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 어깨가 떨리리라. 후회와 아픔으로, 그리고 끝닿을 수 없는 갈망 때문에 저 여자는 소리내어 울지도 몰라. 왜? 어떤 권리로 내가 저 여자를 하루에 두 번씩 울리고 있는 건가.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기에 내가 지닌 진실의 색깔이 얼마나 진하다구 저렇게 귀한 집 처녀를 울린단 말인가. 강민우는 자리에서 뿌스스 일어섰다. "쪼께 기다려야 먼 밥이 되겠는게라우. 어째야쓰까 잉......" 탁자가 여닐곱 개 놓여 있는 홀로 나오자 식사를 재촉하려 나온 줄 아는 모양인지 주인 아주머니가 그렇게 물었다. "괜찮아요. 천천히 해주셔도 돼요." "헌디 총각......" 아주머니가 뜨개질하던 실꾸러미를 치마폭에 놓으면서 말했다. "왜요?" "조로코롬 이쁜 큰애기가 있는디 멀라고 죽을라 했소?" "예?" "그라문 먼 볼일이 있어서 이 치분 겨울에 꾀벗고 물속에 뛰어 들었는가?" 하하, 아주머니 그런 게 아니예요. 그러나 구태여 그렇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쩌면 이 아주머니가 궁금하고 궁금해서 생각하고 추리한 대로 난 죽어버리고 싶었는지 몰라. 정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해대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닌가...... 죽어도 아무 것도 밑질 게 없다는 배짱 때문에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잃을 것 또한 없다는 홀가분한 느낌이 그에게 깡을 주었고 배짱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저 여자아이 때문에 죽는 게 무섭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만일 맨손과 대결하기 전날 저 아이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 날 내가 쓸데없이 저 아이에게 사랑한다니 뭐니 하는 마음속 말을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내가 맨손에게 그렇게 형편없이 지지는 않았을 거야. 이제 와서 창피하고 분해서 어떻게 백곰대학 근처에 나타난담...... 장미마담이랑 서대동은 지금쯤 007영화를 보고 난 기분일 꺼야. 물건처럼, 감자부대처럼 거꾸러 한강 똥물에 풀썩 떨어진 사내를 웬 날씬한 모터보트가 나타나서 주워 싣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으니 그게 바로 접착제 본드 나오는 007영화를 본 기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강자기!" 상미의 얼굴에 깔린 우울은 여름 소낙비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미안해!" "괜찮아요...... 어머 저기 좀 봐!" 강민우는 상미가 손가락질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 어른 키만큼이나 되는 큰 갈대밭이 일렁이는 물결처럼 으스스으스스 소리를 내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저 안에 들어가봐요." 상미의 말에 따라 수상음식점을 나와서 그들은 갈대밭 입구로 들어섰다. "아마 여기서 바다가 멀지 않은가 봐......" "어떻게 알죠?" "갈대가 몹시 억세어 보이는걸. 민물을 마시고 크는 갈대는 저렇게 굵지가 않아 자, 보라구......" 강민우는 상미에게 만년필 굵기만한 갈대를 꺽어 보였다. "갈대는 뭐죠?" 상미가 갈대 끝을 입으로 깨물면서 물었다. "글쎄, 나무가 되려고 애쓰는 풀?" "나무가 되려고 애쓰는 풀......" 상미가 그렇게 민우의 말을 받았다. 강하구 어디선가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그 갈대들의 몸을 서로 비비게 하여 서걱대는 소리를 내게 만들고 있었다. 푸푸푸 하는 소리를 내면서 물오리 몇 마리가 허공을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그거 참말이에요?" "뭐?" "우연히 했다는 그 거짓말." "참 이상하군. 난 상미 앞에서 결국 거짓말을 참말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야. 난 내 자신을 잘 알고 있노라고 여태까지는, 아니 상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난 상미 앞에 서면 내 자신이 나무가 되려고 애쓰는 저 갈대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야......" 끝없이 이어진 갈대밭이었다. 그 갈대밭 사이에 제멋대로 이어진 소로길은 질척하고 눅진거렸으나 그 길 위에 적당히 쓰러져 누운 갈대 때문에 발목이 빠지지는 않았다. "아빠한테 민우씨 얘길 했더랬는데......" 상미는 그렇게 말꼬리를 흐렸다. "법학과에 다니는 고학청년이라구?" "네, 그리구 태권도 여섯 개나 한다구요." "여섯 개가 아니라 육단이야. 참 내일이 우리 도장사람들 승단 심사보는 날인데 내가 여기서 이러구 있군!" 그러나 참 이상한 일이었다. 강민우는 잘 익은 보리밭처럼 출렁이는 그 갈대밭 한가운데에 서 있으니까 도장일이랑 맨손, 장미마담, 도장사장, 월급, 그 모든 일들, 그러까 일상(日常) 속에서 자신을 연결하고 있던 그 많은 생활의 끈들이 투명하게 끊어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남의 일처럼, 멀리서 둥둥 떠다니는 꿈속의 배처럼 뽀얗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 죽어 버리자. 저 갈대밭 끝에서부터 불을 지르고......" 강사범은 불쑥 그렇게 말했다. 걸을 때마다 와삭걸면서 이마랑 얼굴을 간지럽히는 큰 키를 가진 바싹 마른 갈대밭 끝에다 불을 지르고, 그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서 죽어버리자. "약한 소리만 하는군요." "그럼 어떻게 하니. 아무리 생각을 해봐두 뚫고 나갈 길이 없는걸." "내가 부잣집 딸이라서?" "그것두 그렇구......" "내가 대학생이라서?" "물론 그것두 그렇구......" "장미마담 때문에?" "뭐라구?" 아니, 도대체 어째서 이 여자아이의 입에서 장미마담의 얘기가 나온단 말인가? "장미마담 얘긴 언제 들었어?" "같이 살다시피한다면서요?" "천만에......" "닭발 내밀지 마세요." "닭발은 소주 안주지......" "그 여자보다 내가 못해서요? 그 여자하구 살아 버릴까 한다면서요? 그런데 왜 나하구는 못 살아요? 내가 그여자보다 밥을 많이 먹어서 먹여살릴 힘이 없어서요? 내가 그 여자보다 키가 커서 큰 방이 필요해서 그런가요?" 상미가 앙탈을 부렸다. "나하구 살구 싶어?" "그럼 책임 안질꺼예요?" "책임?" "그럼 책임져야죠. 멀쩡한 처녀 건드려 놓구 맥빠진 소리만 한다구 해서 내가 쉽게 물러갈 줄 알았어요?" 아이구, 이거 큰일났군. 바야흐로 이게 육이오군. 난 네가 그렇게 엄청난 생각까지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지금 한 말 그거 정말이야?" "아까 나보구 같이 죽자면서요? 자기가 죽자면 같이 죽어버릴 용의도 있어요. 허지만 이런 말이 있잖아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사망 내지 졸도라는 말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선 같이 죽기 전에 살아봐야 할 꺼 아니에요?" "그건 그래......" "그럼 이제 내 앞에서 다시는 그렇게 마음 약한 소리 하지 마세요, 알았죠?" "알았어......" "약속해요." 상미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내 귀여운 여자...... "난 한다면 하구 안한다면 안한다구......" "여기 똑똑한 사람 하나 있네요......" "공주님, 그럼 다 끝났는데 여기서 뭘 할껍니까, 가지요." 상미가 깔깔 웃으면서 겅중겅중 뛰어가기 시작했다. 사슴처럼 긴 다리...... 그렇게 뛰는 상미를 바라보는 강민우의 가슴은 태양과 달을 동시에 안은 듯이 뿌듯했다. "오메, 매운탕 다 식어 버리는 줄 알았고마. 싸게 먹드라고, 소주 한잔 줄까 잉?" 주인 아주머니가 나란히 들어서는 민우와 상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 좋습니다." "아줌마!" 상미가 주인을 불렀다. "먼 일이당가?" "여기서 하숙 좀 할 수 있어요?" "하숙?" "네, 한 다섯 달쯤이요." "다섯 달씩이나? 글쎄......" "상미야......" "왜요?" "어떻게 하숙을 하니?" "그럼요?" "너 정말......" 상미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댔다. 더 딴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상미는 아주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봄볕 따가운 푸른 보리밭 이랑에서 갑자기 날아오르는 꾀꼬리처럼 그녀의 목소리와 얼굴은 풋풋했다. 그 꽤꼬리의 진노랑 날개에서와 같이 한줌 봄 햇살이 사방에 날아떨어질 것 같았다. "정말 여기서 하숙을 할 작정이야?" "왜요? 여기가 어때서요? 갈대밭도 좋구 음식도 이렇게 맛있는데......" 정말 철이 없는 여자애군...... 그도 그럴 거야...... 생전에 눈물이 섞인 밥을 먹어 보지 못했으니까...... 사람의 입에 한 그릇의 따뜻한 밥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지 못할 테지...... 아무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 강민우는 푸푸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왜 웃어요? 기분 나쁘게스리. 남은 심각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앞에서 웃으면 어떡해요." "그래, 미안해요. 아가씨, 아가씨가 얼마나 심각하게 얘길 하는지 정말 우스워서 그래요." "얼라? 자기 정말 그렇게 나갈 거예요?" "왜 내가 어때서?" "정말 그렇게 삐딱하게 나기기냐구요." "내가 삐딱하게 나갔다구?" "그럼 뭐예요. 남은 심각하게 앞일을 의논하자구 하는데 김빠지게 푸푸 웃기나 하구." "이봐요, 아가씨. 내 한 달 수입이 얼만줄이나 알구서 하숙을 하자는 거야? 정확하게 십 오만 원이라구. 그거 가지구 둘이서 하숙을 할 수가 있나? 백곰대학 근처는 방 하나를 둘이 쓰는데도 하숙비가 얼만지 알아? 칠만 오천 원이라구. 그러니까 십 오만 원 가지구 우리 두 사람 하숙비를 내고 나면 땡전 한푼 남는 게 없다 그런 말씀이야. 그런데 하숙을 해? 하다 못해 목욕탕 가는 비용이라두 남아야 하숙을 할 거 아냐......" "그건 걱정 안해도 돼요." 자신있는 어조로 상미가 그렇게 말했다. "어째서?" "제가 용돈타는 거 보태면 되잖아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상미가 그렇게 말했다. 강민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기사...... 그럴테지, 그러나 그럴 수는 없어. 어떻게 하면 이 아이의 버릇을 고칠 수가 있담. 정말 단간 셋방에서 아침저녁 기침을 해대면서 연탄을 갈아넣고 시장에 나가서 이것저것 반찬거리를 구경만 하다가 결국 젖은 신문지에 두부 한모 달랑 싸들고 들어오는 살림을 이 아이가 할 수 있을까? 하숙비 얘기를 하니까 선뜻 자기용돈 얘기를 꺼내는 이 여자아이의 철없음을 어떻게 타일러야 한단 말인가. "다시는......" 눈을 부릅뜨고 강민우가 말했다. "내 앞에서 그따위 얘길 하지 말아. 만일 정말 네가 나하고 같이 산다면 넌 굶더라도 내가 벌어온 돈으로 살아야해!" 단호한 어투로 강민우는 그렇게 말했다. "알았어요......" 상미는 금새 찔끔해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상미의 모습은 뭐랄까 가을에 잘 익은 배의 속살처럼 사근사근했다. 밥을 먹고난 다음에 그들은 나란히 방에 드러누웠다. "상미야 노랠 불러줘, 실컷 자게. 자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자장가?" "아무거나......" 상미가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자고 부는 바람 따라 우는 물새의 작은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등대를-- 잠을 깼을 땐 이미 어두컴컴한 저녁이었다. 저 먼 상류에서부터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불어나서 하류에 있는 큰 강을 넘치게 하는 여름 장마처럼 저녁이 소리없이 다가와 있었다. "봐요, 저녁놀이 보여요." 먼저 일어나 앉아 있던 상미가 창문을 열었다. 거기 우수수 일렁이는 갈대밭 너머로 붉은 벌판에 뭉뚱그려진 황금색 놀이 한겹 펼쳐져 있었다. "정말 아름답군......" "나보다 더요?" 민우는 그러는 상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었다. "실컷 잤어요?" "응, 아주 많이......" 상미의 어깨를 싸잡아 껴안으면서 민우는 그 저녁놀을 바라보았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그 찬란한 놀이 단순히 아름답기만 하면 얼마나 좋으랴. "가자, 상미......" 그러나 그렇게 우수수 일렁이는 갈대밭을 누렇게 타올리면서 하늘 낮은 곳에 떠있는 저녁놀이 강사범에게는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어디루요?" "도장으로 가야지, 내가 문을 잠가야 되거든. 내일 아침에 승단 심사도 있고 하니까 가봐야 돼......" "꼭 가야 돼요?" "가야지 어떡허니...... 남의 돈 받아 먹으면서 도장을 내팽개치구 이렇게 그림 좋은 데만 있으면 되니?" "그럼 난?" "왜 집에 가기 싫어?" "안갈 꺼야, 죽어도......" "큰일났군......" "나 이제부터 어디든지 자기 따라 다닐 거야. 다시는 어리석은 일에 목숨 내놓고 던지지 않도록 감시할 거야. 자기 이젠 혼자 몸이 아니란 걸 똑똑히 알아야 한다구......" "집에 안 들어가면 아빠가 가만 있을까?" "가만 있지 말래지 뭐. 아빠도 딸 자식은 아무리 예뻐해도 훌쩍 어느 땐가는 날아가 버린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해...... 딸은 나비와 같은 거니까...... 너무 꼭 쥐면 날개가 부서져 버리구 놓아주면 날아가 버리구 한다는 걸 알거니까. 난 그래서 아들만 낳을 거야......" "자신 있어?" "그럼......" "좋다, 가자. 네가 그렇다면 끝까지 나가보는 거지 뭐......" 강민우는 번쩍 상미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나가자 씩씩하게 대한소년아, 태극기 앞에 들고 앞장을 서서...... 야 임마 길들 비켜 안 비켜? 안 비키면 이 강사범이 모조리 작살을 내줄 테다, 비켜 임마......" 강사범은 상미를 업고 나오면서 눈에 띄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그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별 미친놈이 계집 끼고 다니면서 지랄이군. 강사범의 등 뒤에다 대고 그렇게 눈을 흘기는 사람은 있었으나 서슬퍼런 강사범의 고함에 본격적으로 시비를 붙는 사람은 없었다. 택시를 타고 강사범은 도장 <청룡관>에 도착했다. "아니 형!" 서대동이었다. "미안해!" 강사범은 궁금한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 그런 식으로 사과의 말을 했다. "도대체 스토리가 어떻게 돌아가는 스토리유?" "본 대로 들은 대로야......" "그럼 모터보트 몰고 날씬하게 나타난 아가씨가 전상미였다. 그거죠?" "바로 봤군......" "역시, 형은 발만 빠른 줄 알았더니 손도 잽싸구랴. 그래 어느새 일이 고로코롬 환장하게 진행이 됐수?" "나도 잘 모르겠어. 그나저나 내일 승단심사 나갈 사람들 준비 다 됐겠지?" "바쁘다 바뻐, 형 근데 어떡허지?" "왜?" "이거 어디 기가 죽어서 해먹겠수?" "뭐가?" "참, 기가 차서. 아 글쎄 아까 오후반 학생들이 대련을 하고 있는데 맨손이 소주병을 옆구리에 차고 나타나 가지고는 너희들 그런 무용체조 맨날 그만하구 한강물에 빠지는 연습이나 해두라구 된통 야지를 놓는 통에 승단심사고 뭐고 맥이 빠져서 운동이 돼야 말이죠." 그렇겠지...... 그러나 강사범은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이 바닥을 떠야 하나? "순간 강사범은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 상사야......" "그럼 다시 한번 붙겠다 이거유?" "기횔 봐서......" "야, 모두 들었지. 다음에야말로 맨손인가 찬손인가 하는 놈이 목이 부러질 차례니까 모두 기죽지 말고 운동 열심히 합시다. 사실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주먹 좀 쓴다하는 사나이 대장부끼리 줄다리기로 결판을 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는 일 아닙니까, 안 그렇소 청룡동지 여러분!" 서대동이 그렇게 일장 연설을 했다.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도장원생들 앞에서 강사범은 자신있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하고 의논할 일이 좀 있어......" 아직도 더 너스레를 떨 심사인 서대동의 소맷자락을 끌면서 강사범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럽시다." 언제나와 같이 서대동은 선선히 따라 나왔다. "우선 비밀을 지킨다는 약속을 해줘야겠어!" 다방에 마주 앉자마자 강사범은 먼저 서대동에게 다짐을 주었다. "아니 뭔 얘긴데 그렇게 겁부터 주는 거유?" "글쎄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어디 가서 뻥긋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니까......" "좋습니다. 형님, 저도 한다면 하는 놈입니다. 그래 뭡니까?" "이동네 전세방이 얼마나 하지?" "한 이백만 원쯤 할걸요?" "이백만 원? 그것보다 더 싼 건 없나?" "왜요, 저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오십만 원에 월세 삼만 원짜리도 있죠." "보즘금 오십만 원에 월세 삼만 원이라 그거지?" "그런데 왜? 방은 갑자기, 형 그럼 혹시......" "혹시?" "장미마담하구?" "틀렸어......" "그럼요?" "상미!" "설마!" "정말이야......" "아이구 형, 큰 거 물었수!" "큰 거라니?" "걔네집이 아실아실한 삘딩을 가지고 있다는 거 알우?" "알아!" "그러니까 큰 거 물었다는 거 아뉴......" "불순하게 생각하지마. 어떤 일이 있더라도 걔네 신세는 안질 생각이니까. 이유가 있다면 단지 사랑한다는 것 그것뿐이야......" "축하허우, 아뭏든, 그래 걔하고 지금 살림을 차리겠다 이겁니까?" "맞아, 어디 돈 한 이십 빌릴 데 없을까? 내일 당장 말이야......" "이십이면 큰돈인데 그렇게 급허우?" "지금 요건너 다방에 앉아 있다니까. 오늘부터 죽어두 집에 안 들어간다는 거야, 뭐 내가 어리석은 일에 목숨을 거는 걸 감시한다나......" "그럼 급하긴 급하네요......" "글쎄 급하다니까. 내 수중에 한 삼십은 있는데 말이야..." "알았수, 내가 집에 가서 등록름이라도 좀 일찍 달래오든지 하숙친구들한테 몇만 원식 돌려보든지 할 테니까 그건 걱정마슈. 근데 달랑 방만 얻으면 어떡합니까...... 라면 끓여먹을 솥단지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글쎄......" "좋은 수가 있수!" 서대동이 무릎을 탁 쳤다. "좋은 수가 있어?" "그럼요." 서대동은 엽차 한잔을 단숨에 꿀꺽꿀꺽 들이키고 나서 선뜻 말했다. "아주 결혼식을 올려버리면 될 꺼 아뉴......" "결혼식?" "그래요." "이봐, 나 지금 농담따먹기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지금 요 옆에 상미가 고양이처럼 앉아 있다니까." "왜 어때서요? 형, 결혼이란 건 말이요 원래가 성스러운 것이에요. 옛날에는 결혼 첫날밤에 여자가 순모가 아니란 것이 들통나면 그대로 바가지 쓰고 쫓겨났다구요. 그러니까 뭐냐 결혼이란 걸 풀이해 보면 그게 이혼의 반대 말인데 남녀간에 거시기...... 넘어서는 안될 삼팔선을 넘기 전에 우리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고 파뿌리가 다시 마늘뿌리가 될 때까지 마음변하지 말고 삽시다, 하는 맹세를 하는 의식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요새는 그게 거꾸로 돼 가지구 피차 서로간에 공부는 여관방에서 진도 다 나가 버리구 돈만 잔뜩 들여서 결혼식 올린 다음에 신혼여행이라고 가서 호텔 웨이터를 좋은 일만 시킨단 말이에요. 안 그래요? 요새 사실이 대충 그렇게 돌아 간다구요." "글쎄 그건 그런데 말이야......" 강사범은 그렇게 우물거렸다. 이 서대동이란 친구가 뱃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찔금 했지만 거기서 나 챔피언 먹었어 하는 식으로 나 상미 먹었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내가 형 보구 결혼식을 올리라는 것은 어떻게 어떻게 사글세 방을 얻을 돈이야 만들 수가 있을 테지만 커피포트도 있어야죠, 전기다리미 아니 비닐 옷장이라도 하나 있어야 살림을 시작할 꺼 아닙니까. 그러니까 청룡 도장 앞에다가 강민우와 전상미 결혼식, 그렇게 플래카드를 써붙여 놓으면 장미마담이 속을 쓰릴지언정 전기밥솥 하나는 들고 올 테구 에 또 방범대장 용팔이 아저씨가 쌀 한 가마 지고 올 테구 그렇게 그렇게 해 가지고 살림을 시작하라 이겁니다." 서대동의 말을 듣고 보니 역시 대학생다운 그렇 듯한 말이었다. 어차피...... 강사범은 생각했다. 내가 나중에라도 이 쌀쌀맞은 서울 하늘 어디선가 한 여자와 백년가약을 맺는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면 낙동강 오리알처럼 세상에 단 혼자 툭 불거져 나와 살고 있는 나로서는 서대동의 말마따나 방범대장 용팔이 아저씨에게나 조금 의지해 보는 수 밖에 별도리는 없겠지만 상미, 그녀는...... 아, 어떻게 그녀에게 결혼식에서부터 후진꼴을 보여 주어야 한단 말인가. "아뭏든 내가 부탁한 그 돈이나 좀 빨리해 줘......" "형, 글쎄 내 말대로 하라니까요. 그리구 오늘 저녁은 우리 하숙집에서 초대를 할 꺼니까 그렇게 하세요. 아셨죠 형?" "알았어. 그럼 저녁 한 끼 신세지지." "어이 형두. 말씀 그런 식으로 하지 마슈. 좌우간 이따와요." 서대동을 보내고 강사범은 상미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상미는 피곤한 모양인지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얹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피곤해?" 강민우는 좀 못 생겨 보이는 그녀의 커다란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아뇨. 이젠 제 손이 더 미워 보이죠?" 새삼스럽게 상미는 자기의 손 얘기를 꺼냈다. 가을 축제 때에 놀란 게처럼 뒤로 감추어지던 그녀의 손...... "무슨 소리야? 난 상미의 발톱까지도 예뻐 보이는 걸......" "피이, 거짓말......" "괜찮겠어?" "글쎄 아까도 제가 말했잖아요. 제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건 함부로 시시한 일에 목숨을 거는 자기를 보살피기 위함이라구요." 티없이 맑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상미는 말했다. 마치 높푸른 가을 하늘처럼 그리하여 거기 돌멩이 하나라도 던지면 은쟁반에 유리구슬이 따그르르 따그르르 구르는 듯한 소리가 날 것 같은 밝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서대동이란 친구 상미도 알지." "왜 몰라요, 그 익살꾸러기?" "응......" "근데 왜 그 사람 얘긴?" "글쎄 그 친구에게 내가 상황설명을 하고 협조를 구했더니 결혼식을 올려버리라는 거야......" "결혼식을요?" "사실 지금 나한테는 오십만 원에 삼만 원짜리 방 한칸을 얻고 나면 주머니마다 탈탈 먼지 냄새밖에 안 나거든, 그런 사정을 얘기했더니 그 친군 결혼식을 올리라는 거야." "자기 참 가난하다." 상미가 양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말했다. 그런 상미의 얼굴을 바라보는 민우의 가슴은 금새 싸한 슬픔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넌 그걸 몰랐니? 그렇게 상미에게 묻고 싶었다. 일찌기 난 너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단단한 주먹과 잽싼 발길질 뿐이라고 말했잖니. 또 한 가지 있다면 그러나 어깨를 펴고 솔직하게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 가난한 마음이 하나 더 있다고 말하지 않았니? "미안해 상미!" "아뇨, 저는 다만!" 상미가 꽈리같이 말간 입술을 꼭꼭 깨물다가 말했다. "정말 저하고 결혼을 원할 뿐이라는 말만을 듣고 싶었어요, 다른 의미가 없는 순수한......" 상미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 반짝 눈물방울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걸 몰랐군...... 결혼이라는 프로포즈를 하면서 얼마 되지도 않을 부줏돈 때문이라고 내가 얘길 하다니, 그래서 마음이 아픈 모양이구나, 귀여운 내 사슴. "나와 결혼해 주겠소?" 강사범은 엄숙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상미는 눈물이 또르르 굴러 내린 얼굴을 들어 강사범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요, 결혼할래요. 백 번이라도 천 번이라도 난 자기하고 결혼할 거예요." "그래, 우리 나가서 시원한 바람이도 쏘이자." 강사범은 상미의 어깨를 싸안다시피해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둘은 겨울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볼을 찌르는 날카로운 바람이 윙윙거리면서 겁을 주고 있었으나 강민우는 조금도 춥지 않았다. "추워?" "아니......" 강사범의 튼튼한 허리에 팔을 두르고 상미는 아기처럼 도리질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를 끼고 걷고 있으니까 얼굴에 닿아오는 바람이 아주 시원하게 온몸에 전해져 오고 있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수도꼭지 밑에 디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부웅하고 어디선가 비행기가 까맣게 높이 떠서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내가 퀴즈 하나 낼까?" "그래......" "식인 시리즈 알지?" "응, 알아......" "어디가지?" "식인종 엄마가 아기를 낳아 가지구 친정에 가는데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대문에 들어가니까 식인종 친정 엄마가 얘, 먹는 음식을 그렇게 다루는 게 아니다 했다는 거까지......" "피, 그건 천 구백 칠십 구년도 십이월 판이구, 식인종 아버지하고, 아들하구 어딜 가는데 있잖아요, 부르릉하고 비행기 날아가는 소릴 듣고 아빠 저게 뭐야 그렇게 아들이 물으니까 식인종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몰라." 정말 그런 퀴즈는 강민우로서는 하나도 맞힐 수가 없었다. 참새 두 말리가 앉았는데 포수가 꽝 총을 쏘니까 한 마리는 죽구 한 마리는 살았다. 왜 한 마리만 죽었게? 응, 그건 충청도 새라 동작이 느려서 죽었대...... 그런 순 황당무계한 수수께끼를 어떻게 알아 맞힐 수가 있다는 말인가. 황당무계는 노란당근이 무게가 더 나간다로 풀이되고 오리무중은 모리가 무우밭에 들어가면 중심을 못 잡는다라고 해석되는 세상인데...... "식인종 아빠가 비행기를 보구 뭐라구 그랬어?" "아들한테 이렇게 말했대요. 응, 저거 통조림이야, 까먹는 통조림." 웃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식인종의 눈으로 보면 사람을 잔뜩 실은 비행기가 통조림으로 보일 테니까 말이다. "우리 애기 몇이나 낳을까?" 강사범이 상미를 싸안은 팔에 꽉 힘을 주면서 물었다. "자긴 몇이나 낳구 싶어?" "응, 열 명......" "아휴 열 명씩이나?" "응, 여자 다섯, 남자 다섯 낳아 가지구 여자농구팀 남자농구팀 만들게......" "피이." 둘은 그렇게 웃으면서 발길 닿는 대로 이골목 저골목을 싸돌아다녔다. "자기......" "응?" "나, 배고파." "벌써 배고파?" "응......" "나 가난하다는 거 알면서 그렇게 때도 안돼서 배가 고프면 어떡해?" "애기가 생겼나보지 뭐......" "당일로도 애기가 생기나?" "피이, 자기는 지붕을 덮는 커다란 오동나무두 팥알만한 씨앗에서 움튼다는 걸 모르나 부지?" "허, 듣고보니 과연 그렇군, 그럼 우리 뭐 좀 먹으러 가지......" "뭐 사줄 건데?" "짜장곱배기? 아니, 참, 서대동이가 하숙집으로 와서 저녁 먹으라구 했어......" 강사범은 상미를 데리고 부지런히 서대동의 하숙집으로 향했다. "형이유?" 강사범이 대문을 두드리자 서대동이 안에서 물었다. "응, 나야......" "여자도 같이 왔수?" "그래......" "형, 쬐끔만 기다려요......" 강민우와 전상미가 대문 앞에서 잠시 서성거리고 있자니까 안에서 서대동이가 이리저리 부산을 떨고 있었다. 대문이 열렸다. 강민우와 상미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짝짝짝, 그 집에 하숙을 하고 있는 이십 여명의 총각들이 모두 나와서 박수를 쳐대는 것이 아닌가 "에, 또 지금으로부터 태권도 육단 강민우 사범과 체중 오십킬로의 전상미양의 약혼식을 거행해 올리겠습니다." "아니 무슨 소리야?" 강사범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대동에게 물었다. "남대문 지게군도 순서를 지키는데 어찌 결혼식에 순서가 없을까 보냐, 결혼식 전에 하는 게 약혼식이요 그 다음이 결혼식, 그 다음이 에 또 이혼식이 아니겠는가 내 말씀은 그 말씀이다 이겁니다." 서대동은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 강사범과 전상미를 안집마루로 안내했다. "에 또, 조명기사 무드 잡아!" 마루에 켜져 있던 형광등이 꺼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가스라이터를 켜서 안방 마루 이곳저곳에 준비되어 있던 초에 불을 밝혔다. 그러자 사위는 가늘게 흔들리는 촛불에 따라 신비한 분위기로 변해 갔다. 하숙집 총각들이 둘러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잔치잔치 벌였네 무슨잔치 벌였나, 강사범이 장가가고 전상미가 시집가네." --어서 한잔 주시요, 나도 한잔 먹겠소. 강사범은 누군가가 건네주는 소주잔을 받으면서 그렇게 노래를 받았다. "자, 신랑 신부가 서로 한잔 부라보를 한 다음에 우리 하숙집 아주머니가 특별케이스로 돼지고기를 한 근 더 썰어 넣어서 만든 김치찌개로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합시다." "야, 약혼식에 김치찌개는 너무했다." "모르는 말씀, 그저 올해 같은 겨울에는 카, 소주 한잔에다가 김치찌개가 최고라는 걸 아셔야 해요. 우선 먹읍시다." "이제 무드 다 잡았으면 거 불 좀 켜구서 밥 먹읍시다. 왕건이가 보이질 않겠느걸!" "그럽시다." "아 모르는 소리!" "모르긴 뭘 몰라, 약혼식이라구 꼭 촛불 켜고 밥 먹어야 하나?" 불이 켜졌다. 밥상이 들어왔다. 숟가락과 젓가락, 밥공기, 찌개그릇 그렇게 밥을 먹는데 필요한 도구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서 어떤 총각이 곱게 받쳐들고 들어오는 케이크 하나. "에, 이 케이크는 우리동네의 의리의 사나이이자 태권도 육단인 강민우 사범이 드디어 꽃 같은 처녀 전상미양을 만나서 내일부터 꿀 같은 새 살림을 차리는데 대한 전야제겸 약혼식겸으로 우리 하숙생 일동이 준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아니 오늘부터 두 분이 살림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필요하다고 사료되옵는 은숟가락 젓가락 한 쌍의 기증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신랑 신부 기립......" 강사범과 전상미는 서대동의 앞에 일어나서 곱게 포장한 선물을 받았다. "자, 다음은 케이크 촛불을 끄고 신랑 신부가 한조각씩 나누어서 걸신들린 우리 하숙생 일동에게 골고루 한조각씩 나누어 주시도록...... 아까 누가 형광등 켜자고 그랬어? 다 사회보는 사람이 알아서 할일을 가지구 무드 깨고 있어. 자, 강형, 어서 케이크에 꽃힌 촛불을 꺼요." 강사범은 아기 새끼손가락만한 색색의 촛불이 꽂힌 케이크 앞에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후 볼에 바람을 넣어서 그 촛불을 끄려는데 갑자기 코허리가 시큰해지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무엇인가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목울대 근처로 올라왔다. 눈물. 눈 앞이 흐릿해졌다. 생각하면 그렇게 버림받고 외로이 살아온 젊은 생애였다. 생일케이크 한 번 잘라보지 못하고 추운 겨울에도 쓰레기더미 옆에서 떨면서 따뜻하게 불이 켜진 남의 집을 바라보던 그 어린 나날들...... 비록 초라한잔치라고 하더라도, 비록 그것이 법적으로 용인 받을 수 없는 장난스런 약혼식이라 할지라도 강민우 그에게 있어서는 진실로 눈물겨운 자리였던 것이다. "강형, 왜 좋은 날 울우?" 서대동이 강민우의 어깨 툭툭 치면서 말했다. 울고 싶었다. 옆에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다면 두 다리를 쭉 뻗고 엉엉 소리내어 하늘을 보고 통곡하고 싶었다. "자, 강형, 어이, 이거 안되겠어. 자 다들 오늘의 주제곡 한 번 더 합창하자구 하나 둘 서이너이, 시작." ...... 잔치잔치 벌였네...... 노래가 끝나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상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아까 받은 선물포장지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고 하더니 안 먹어?" "부끄러워요." 상미의 대답에 총각들이 와그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약식으루 해두 식은 식이니까 신부가 부끄럼을 타는 모양이야." "그나저나 화장도 하지 않는 신부는 난생 첨 봤다." "츄리닝 입은 신랑은 어떻구......" "그야 도둑장가를 들라니까 바빠서 그랬겠지 뭐......" "어이!" 서대동이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왜?" "한 가지 빠진 게 있어......" "뭔데?" "사진......" "그렇군......" "아무리 간소하게 한다구 해두 사진이 빠지면 안되잖아." 누구 똑똑한 놈 둘만 보내서 사진기 좀 빌려오지...... "형님, 대충 다 끝났는데 뭘 그러십니까......" "아냐 우린 한다면 해......" 서대동의 말에 두세 사람이 아 이거 밥도 제대로 못 먹겠군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한잔 듭시다." 팽이만한 소주잔이 강사범의 앞으로 건너왔다. 강사범은 한 입에 그 술을 털어 넣었다. "잘 마신다......" "코끼리가 땅콩 먹는 거 같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갔다. 술기운이 몸에 돌기 시작하자 하숙집 총각들은 조금만 우스운 얘기가 나와도 큰소리로 껄껄거리곤 했다. "상미야, 나 오늘 술 좀 마신다." "아, 마셔요, 마셔 버려요."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하는 거지 뭐......" 그러자 상미가 말했다. "아니 첫날밤부터 술에 취할라구요?" "어머, 신부가 바가지 한번 되게 빨리 긁네......" "요새 바가지는 플라스틱이라 소리도 요란해요." 술이 거나해지자 모두 한 곡씩 노래를 했고 사람들의 강권에 상미도 일어나서 얼어 붙은 달그림자...... 하는 노래를 했다. 준비되어 온 사진기로 기념촬영을 하는데 누군가가 나 좀 잘 박아줘요, 그리구 빨리빨리 빼줘요 하는 농담을 해서 한바탕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하숙집 총각들과 일일이 정겨운 악수를 나누고 강사범은 상미와 그곳을 나왔다. "이런 선물 받고 보니까 정말 약혼식을 한 기분이에요." 상미가 강사범의 팔짱을 꼭 끼면서 그렇게 말했다. "약혼식이라는 게 별 건가?" 천천히 백곰대학 쪽으로 걸어 올라가면서 강민우가 말했다. "응, 있잖아요. 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자리에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구,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상미야, 난 그걸 잘 몰라. 나란 놈은 엄마 아버지 얼굴조차 본 일이 없었으니까 말이야, 만약 나한테도 부모가 지금 있다면 될 수 있으면 부모님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꺼야." 그러자 상미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딱 멈추었다. 태엽이 풀린 인형처럼 굳어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뭐예요, 저 보구 집으로 들어가라 그런 얘기예요?" "아직도 늦지는 않았어......" 그건 정말이었다. 상미를 보면서 그간 남자가 진실로 아끼는 보석에는 흠집을 내지 않는다는 생각을 몇번이나 했을까. 그러나 지금도 이 아이의 그 밝은 얼굴을 흐리게 하면서까지 가난한 살림을 시작할 생각이 강민우에게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싫어요." 상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무엇이 무서워서 널 피하겠다는 생각을 하겠니? 그것이 상미를 위해서 좋은 일 같으니까 그런 거지......" "그럼 자기는 내가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을 간다구 해두 말리지 않겠네?" "그거하구 이거하군 틀리잖아......" "뭐가 틀려 마찬가지지......" 그래. 좋다. 어떻게 말한다 하더라도 네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면 춥고 가난할지라도 시작을 해보는 거다. 그렇지만 네가 얼마나 그걸 견디어 낼 수 있을런지 난 잘 알 수가 없구나. "피곤해." "많이?" "응, 많이. 누웠으면 좋겠어." 강사범도 피곤했다. 종아리가 물에 젖은 청바지처럼 뻣뻣한 것 같았다. "오늘은 여관엘 가서 자야겠는 걸, 방을 구할 때까진......" "싫어, 여관에는......" "왜?" "여관엔 이상한 사람들만 드나들잖아, 그래서 싫어......" "그럼 어떡허니?" "자기 있는 델 가지 뭐......" "거긴 연탄불도 없어. 그런 데서 잘 수 있을 것 같애?" "그래두 어때 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강사범 자신도 상미를 이 사람 저 사람의 머리때가 묻어 있는 여관 베개에다가 눕히고 싶지가 않았다. "추울 텐데......" 도장 문을 열쇠로 따면서 강사범은 그게 걱정이었다. "자기는 안 추워?" "난 오히려 불이 있는 방에서 자고 나면 몸이 개운치가 않아......" "그래두 한강물 속에 빠져 가지고는 달달 떨기만 하더라......" 도장 안은 언제나 그렇듯이 썰렁했다. 수련생들이 모여서 기술을 연마하고 땀 흘려 구령을 붙일 때는 이상한 열기로 가득차던 그 도장이었다. "이불은 없어?" "침낭이 있지......" "침낭?" "응, 여기 앉아, 내가 갖다 줄게." 강사범은 구석에 둘둘 말아 두었던 닭털 침낭을 꺼내왔다. 가운데에 길다란 지퍼가 달린 것이었다. "나 이런 거 처음 보는데......" "응, 겨울에 산에 갈 때 쓰는 거야......" "자기 등산 좋아해?" "하산하는 것보담은 즐겁지......" "그게 무슨 뜻이야?" "응, 아냐. 어서 안에 들어가......" "자긴?" "응, 난 아무 데서나 잘게." "피이......" 상미가 곱게 눈을 흘겼다. 강사범은 그러는 상미를 침낭 밑에 밀어 넣고서 지퍼를 얼굴 밑에까지 꼭 올려 주었다. 그쯤이면 따뜻한 편일꺼야, 새벽에 좀 춥긴 하겠지만서두...... "샤워하고 싶어......" 상미가 모기 소리만하게 말했다. "샤워?" "응, 자기 전엔 맨날 샤워를 해." "내일부터는 어려울꺼야...춥지 않니?" "추워 자기는?" "난 괜찮아......" "이 안에서 같이 자면 안돼?" "내 덩치가 거기 들어가면 상미는 숨도 쉬지 못할 걸......" "어때 뭐......" 강사범도 넓은 마당 같은 곳에 달랑 그녀 혼자 잠을 자게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강사범은 불을 끈 다음에 침낭의 지퍼를 내리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춥지 않게 해줄께, 따뜻하게 해줄께......" 강사범은 상미의 도톰한 입술을 찾았다. 상미의 꽈리 같은 입술이 벌어지면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축축한 혀가 강민우의 입 안으로 깊이 쳐들어왔다. 6. 제비들의 소꿉놀이 아침 일찍 일어난 상미와 강사범은 부지런히 복덕방을 뒤져 나갔다. "방 나온 거 있습니까?" "얼마짜리 찾는 거유, 젊은이들?" "보증금 오십만 원에......" "아마 요새 그런 방 구하기 힘들꺼유, 다른 데루 가보슈." 복덕방 영감태기들의 대답은 대충 그러했다. "상미야......" 아침나절 그렇게 허탕을 치고 나서 강민우는 상미에게 말했다. "내가 어디든지 가서 조그마한 방을 얻어 놓을 때까지 다방에라도 가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니?" "싫어!" "왜?" "응, 제비들은 있잖아.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꾸미기 위해서 집을 짓는데 한 마리는 논두렁의 축축한 흙을 물어오구, 또 한 마리는 마른 지푸라기랑 그런 걸 물어오구 그러잖아......" 그러니까 상미의 말은 방을 구하려고 돌아다니는 길을 끝까지 같이 가겠다는 얘기였다 제비라...... 강사범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풋풋하게 성긴 눈발이 많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그리하여 때때로 검은 휘장을 드리운 듯 막막하던 내 인생에 켜진 하나의 촛불, 상미. 이제 소리없이 봄이 오리라. 그러면 땡땡 얼어붙었던 그 겨울의 물살이 풀리면서 모든 것이 화려한 빛깔을 갖추고 생동하게 되리라. 그러나 아직은 겨울. "왜 그래요, 자기. 내가 따라 다니는 게 싫어?" 말없이 뚜벅뚜벅 언덕길을 향해서 걷고 있는 강민우에게 상미가 물었다. "무슨 소리야......" 강민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상미의 어깨를 싸 안았다. 그런 강민우의 귓볼에 상미의 머리카락이 몇 개 닿았다. 어제밤. 추워, 춰, 하면서 자신의 가슴으로 파고들던 이 애의 샴푸냄새나는 부드러운 머리결. 그 밑으로 당당하게 돌기하고 있던 두 개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 강민우는 정말 오래간만에 푸근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어이, 강사범 웬일이야?" 건너편 동네의 권투도장 코치였다. "응, 볼일이 있어서, 이 동네 사나?" "나, 이 동네 산꼭대기에 사는 지 오래 됐어. 가만 있자. 아가씨를 데리고 이 산동네로 경치도 좋지 않을 텐데 등산을 나온 건 아닐 테구......" "응, 방을 하나 구할려구......" "방?" "응. 뭐 좀 알 만한 데 없을까? 우리 도장에 나오는 백곰 대학생 말만 믿고 오십만 원이면 비바람 피할 오두막 한칸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만 막상 나서 보니 그게 아닌걸......" "그래? 그러면 진작 날 찾아오지 그랬어. 우리반 반장네 집에 빈방이 하나 났다구 그러던데, 방은 작지만 주인내외 인심이 좋아서 괜찮을 꺼야, 같이 가볼 텨?" 일은 아주 손쉽게 풀어졌다. 그건 정말 아주 작은 방이었다. 조그마한 낡은 쪽문이 엄청난 블록담 한쪽에 달려 있었는데 얼핏 보면 그게 변소문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쪽문 옆에다가 <이곳에 소변을 보는 놈은...... >하고 커다랗게 무식한 가위가 벌겋게 그려져 있었다. 요컨대 그 쪽문이 달려 있는 곳이 변소인줄 알고 실례를 하는 친구의 그걸 싹둑! 자르겠다는 엄포였다. 그러나 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장기판 몇 개쯤 늘어 놓을 수 있는 부엌의 수도꼭지에선 찬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거기서 또 문을 열자 깨끗한 도배까지 해놓은 작은 방이 드러났다. "어때 맘에 들어?" "어머, 참 아담해요. 깨끗하구......" 상미가 좋아라 했다. 복덕방을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서구 뭐구 작성할 필요도 없이 강사범은 주인 아주머니에게 돈 오십만 원을 건네 주었다. "신혼이유?" 대강 집구조에 대한 설명을 마친 주인 아주머니가 물었다. "네, 아주머니, 신혼이에요." "응, 잘됐구려. 그럼 살림은 언제 들여 오누?" "음, 그건요...... 아주머니, 하나씩 하나씩 장만할 꺼예요......" "그럼 아직 살림이 하나도 없수?" "아뇨, 있어요." 상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제 서대동의 하숙집 친구들에게서 받은 수저 한 쌍을 내밀었다. "아니 그럼 살림이 수저 두 벌밖에 없다는 거유?" "그래요, 아줌마. 아직은...... 그렇지만 이렇게 튼튼한 신랑이 있으니까 걱정없어요." 상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팔꿈치로 강사범의 허리를 툭툭쳐 보였다. "아이구, 그럼 당장 내가 걸레라도 하나 보태야겠구만." "걸레요?" "그럼, 방에는 우선 걸레가 있어야 방바닥을 닦고 앉을거 아냐?" 마음씨 좋은 주인 아주머니는 정말 잠시 후에 물기가 쭉빠진 걸레 하나를 상미의 손에 들려주었다. "우리 들어가요." 상미가 걸레를 들고 앞서서 방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응, 거기 서서 조금만 기다려요." 상미는 겉옷을 척 벗어서 벽에 걸더니 걸레를 들고 썩썩 방을 닦아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둘은 나란히 그 방에 누웠다. "자기, 키가 커서 큰 이불을 사야 되겠다." "베개두, 큰 걸루 사." "음, 그리구 저기에다가는 예쁜 그림을 하나 걸구, 저기단 조그만 벽시계, 요쪽에단 텔레비젼, 저쪽은 옷장, 냉장고는 부엌에...... 그럼 쌀통은 어디다가 놓지?" "지금 말한 거 다 한꺼번에 사야 되는 거야?" "아니, 한 개씩 한 개씩 사지 뭐!" "한 개씩 한 개씩 사더라두 그런 거 다 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오 년쯤 걸리면 다 살 수 있을꺼야!" "오 년이라!" 강사범은 생각했다. 아까 이 아이가 제비 얘기를 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라면만 삼시세끼 먹는 한이 있더라도 제비가 돌아오는 그 사월까지만이라도 그렇게 같이 살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상미야, 오 년까지 나하고 살 수 있겠니?" 강사범의 말에 상미가 언뜻 몸을 민우에게로 돌리면서 물었다. "그럼 자기는 오 년두 안 살구 날 버릴꺼야?" "아니, 그게 아니라, 상미 아빠가 가만 있겠느냐 그런 말이지......" "찾겠지 뭐......" 상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렇게 대답했다. "상미를 찾아내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잖아. 그 전에 자기가 가서 울 아빨 만나보던지 말이야......" "아빠를? 내가?" "왜요? 태권도 육단이 그만한 배짱도 없어요?" 바보. 넌 아직 몰라. 그건 배짱만 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냐. 너네 아빠를...... 그렇게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빌딩을 가지고 있고, 딸내미 전화 한 통에 파출소까지 변호사를 보내는 사람을 만나서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수가 있다는 거니...... 난 건강하고 젊으니까 당신 딸을 굶기지는 않겠소. 그러니 당신 딸을 날 줘 버리쇼--하고 말한다면 너네 아빠는 분명 허파를 탁자 위에 꺼내놓고 실컷 웃을 거야. 그러면 난 그냥 돌아나와야 해. 왜냐하면 난 어린애가 아니니까 말이야. 어린애라면 떼를 쓸 수도 있겠지...... 내가 고아원에서 다니는 학생이라고 날 업신여기면서 삔드르르하게 구는 놈들을 두드려 줄 때처럼 똥배짱을 부릴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난 지금 어른이야. 그래서 그럴 수가 없어. 강사범은 대답 대신 조용히 상미의 입술을 찾았다. 추운데 돌아다닌 때문인지 상미의 얼굴은 아직 차가왔다. "아이......" 상미가 강사범의 목을 끌어 안으면서도 말은 그렇게 했다. "아이, 싫어......" 그러나 강사범은 상미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우울한 먼지를 털어내기라도 할 듯이 강사범은 집요하게 상미의 입술을 탐했다. 그리하여 상미가 강사범의 목을 끌어안고 몸을 부딪혀 오자 강사범은 옷을 벗었다. 건강하게 드러난 그의 알몸. 한겨울이라 할지라도 풀풀 더운 김을 피워 올릴 것 같은 그의 몸통. 강사범은 그렇게 옷을 벗고 상미의 귓볼에 더운 김을 불어 넣었다. 상미도 이젠 눈을 꼭 감고 어제 저녁처럼 강사범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 솟아오르는 붉은 햇발. 출렁이는 물결과 뜨거운 바람. 사슴처럼 매끈한 상미의 맨 다리가 부끄러운 듯이 포개져서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로 밀물처럼 몰려 들어가는 강민우의 건장한 육체. 나아가는 하나의 조그만 배. 움츠리는 삿대. 부는 바람. 출렁이는 숨결...... 이윽고 강사범은 욕망의 맨꼭대기에서 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그리고 레이스를 끝낸 주자처럼 부스스 허물어져 내려왔다. "아빠가 이런 걸 알면 자기 가만 안 놔둘 꺼야......" "그게 어디 내 탓인가?" "어머, 그럼 순전히 내 잘못이란 말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자기 언제 울 아빠 한 번 만나 봐라, 응?" "싫어......" "왜?" "그냥 싫어......" "사람들은 참 이상해. 자기도 그렇지만 부자라면 무조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사실 울 아빠도 어떤 땐 그렇지만 보통은 안 그런데......" "그건 너한테는 그렇겠지......" "아냐, 자기한테두 잘해 줄꺼야." "웃기지 마. 너네 아빠가 날 보면 정말 날 무슨 도둑놈 취급을 할 꺼야. 내가 뭐가 있니? 학벌이 있니? 집안이 있니? 돈이 있니? 또 몰라, 내가 뭐 좋은 대학이라도 다녀서 너네 아빠가 똑똑한 것 하나라도 사줄 구석이 있다면 모르지만 말이야. 그래서 상미도 우선 일을 벌여놓고 보자 그러는 거 아니니? 내가 그 중의 뭐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너도 정상적으로 날 너네 아빠한테 소개 시키구 약혼하구 그랬을 꺼 아니니......" 강사범의 말에 상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말해 봐. 상미, 내가 화내서 미안해...... 사실 내가 화낼 건덕지는 하나두 없는데 화를 냈구나......" "그렇지만 언젠가는 울아빠를 만나 주겠다구 약속해 줘...... 내가 아빠한테 너무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래......" "그러지......" 강사범은 선선히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우리 시장에나 갈까? 이불도 사야 하구, 우선 간단한 거라두 사야 하니까......" "자기 울아빠한테 전화나 한 통 해 줄래?" "전화?" "응, 울아빠 나 교통사고라도 났나 해서 걱정하고 계실꺼야......" 상미의 말을 듣고 보니까 정말 그랬다. 아무리 요새 세상이 번갯불에 고구마 튀김 볶아먹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상미는 벌써 며칠째나 집에 연락도 없이 들어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가출(家出). "정말 집에서 걱정하겠구나." 강사범의 말에 상미는 금새 풀이 죽는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그러면서도 상미는 그렇게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난 혼자서 잡초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 나가고 있는 것 같아." "뭐가요?" "옛날에 내가 갖은 고생을 하며 거리를 떠돌아 다닐 때 가장 부러웠던 일이 무엇인 줄 알아? 그건 바로 해가 지면 돌아갈 수 있는 집을 가진 사람들이었어! 신문에 보면 그런 게 많잖아? 홍길동아 모든 걸 용서할 테니까 어서 집으로 돌아오너라, 어머님이 위독하시다, 윗 사람의 거처를 연락해 주시는 분에게 후사하겠음 하는 신문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새삼스럽게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곤 했었지. 난 내가 어디론가 없어져도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없다는 거, 내가 죽으면 시청 청소부들이 죽은 개처럼 나를 썩은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화장을 해 버릴 꺼라는 생각을 하면 뼈마디 깊숙이 외로움이 배어 들곤 했었지." "이제 민우씨는 혼자가 아니예요." "그래, 그럴까?" 과연 이 여자애가 얼마나 내 옆에 있다가 내 죽음 앞에 몇방울의 화려한 눈물을 떨구어 줄 수 있을까? "우선 말이야, 상미야, 네가 집에 전화를 해라. 이렇게 무사히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라도 집에 알리는 것이 의무 아니겠니? 괜히 전화도 하지 않고 어물어물 시간 보내다가 너네 아빠가 신문에 큼직하게 사진이라도 내면 어쩌니?" "그럼 매스컴 한 번 타는 거지 뭐......" "까불지 말구 전화 한 번 해드려......" 상미가 민우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그런 상미에게 십 원짜리 동전 서너 개를 쥐어 주었다. 상미가 시장 약국 안에 보이는 빨간 공중전화 박스를 향해서 팔랑팔랑 뛰어갔다. 그녀의 사슴 같은 긴다리는 삼베처럼 뻣뻣한 청바지 안에 숨겨져 있었고 그녀의 설원(雪原)같은 등은 두꺼운 스웨터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제 여름이 되어 그녀가 푸른 바닷가에서 타오르는 햇살 같은 붉은 수영복을 입고 당당히 서 있다면! 파도도, 늙은 소나무 숲들도 그녀의 물방울 같은 청순한 아름다움에 모두 난장이가 되리라. "강사범님!" 담배를 피워 물고 상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강민우를 불러 세우는 여자가 있었다. "아, 장미마담." "전 강사범님이 한강물에 빠져서 아주 돌아가신 줄 알았더니 아직 살아 계셨군요. 정말 그러기예요?" "네?" "아니, 강사범님이 어떻게 되실까 봐 새벽에 거기까지 나갔으면 한 번쯤 가게로 들르시기라도 하셔야 할 꺼 아닙니까, 안 그래요?" 화장을 하지 않은 장미마담의 얼굴은 몹시 바래진 색깔이었다. 대낮에 드러난 뻘건 매니큐어를 칠한 그녀의 손...... 그녀는 밤에 볼 때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낡아 보였다. "글쎄요......" 강민우는 장미마담에게 그렇게 대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민우씨......" 강사범이 장미마담에게 시장 입구에서 만나 그런 어정쩡한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에 전화를 마치고 상미가 뛰어 나왔다. "전화했어?" "네...... 그런데......" "아냐, 아무것두, 자 장미마담 다음에 봅시다." 강사범은 상미와 함께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왜요, 민우씨, 인사 좀 시켜 주세요. 이분이 장미마담이죠? 저 상미라구 해요......" 서대동이가 입을 가볍게 놀려대서 상미가 장미마담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아, 마담, 인사하세요. 이쪽은......" "이 아가씨가 우리 강사범의 속을 태우던 공주님이시로구먼...... 손이 미운 공주님, 안녕하세요?" 장미마담이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상미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래요, 전 손이 미워요. 안녕하세요?" 상미도 지지 않고 마주 장미마담 앞에 손을 내밀며 그렇게 대꾸했다. "점심했어요?" 잠시 두 여자가 날카로운 시선의 교환을 끝내자 강사범이 장미마담에게 물었다. "아뇨, 아직. 왜 점심 사 주실래요?" 장미마담의 말에 강사범은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참, 어쩌다가 일이 요렇게 꼬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마담, 좀 봐줘...... 강사범이 눈으로 그렇게 장미마담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장미마담은 싹뚝 눈꼬리로 강사범의 그런 말 없는 눈길을 잘라 버리고 상미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가씨, 우리 같이 점심이나 할까?" "그럴까요, 아주머니." "호호, 아주머니라니, 난 아직 시집도 안 갔는걸." "어머, 그러세요? 그렇지만 저두 아가씨가 아니예요, 어제 약혼을 했으니까 이제 아가씨는 아니죠. 그렇죠, 민우씨?" 강사범은 두 여자의 사이에 말뚝처럼 선 채로 겨우 입을 우물거려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으나 그게 말이 되어 입 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아니, 강사범님 이게 무슨 얘기예요? 그럼 저한테는 연락도 하지 않고 약혼식을 하셨단 말이에요?" "약혼식이란 원래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해서 하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 이 동네에 방을 얻어 놨으니까 언제 한 번 집에 초대할께요. 그럼, 그때 뵙겠어요. 가요 민우씨...... 시장볼 것두 많은데......" 상미가 그렇게 말하면서 바짝 강민우의 옆으로 다가와서 팔짱을 꼈다. "아, 그래요? 축하해요. 강사범님. 전 그럼 그만 바빠서......" "왜요, 같이 식사나 하시지요." "그럼 다음에......" 아직도 지지 않고 이기죽거리는 상미를 얼른 채듯이 끌고 강민우는 걸음을 빨리 했다. "왜 그래요, 왜 그렇게 서두르세요?" 강사범을 따라 오면서도 상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시장볼 게 많다면서 왜 그렇게 꾸물거려." "뭐 모래알 같은 시간에 그렇게 서둘러요. 나 아까 그 여자한테 물어 볼 게 많았는데......" 상미는 정색을 하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어보긴 뭘 물어봐?" "왜 그런 것 있잖아요, 민우씨가 콩나물국을 좋아하는지 된장국을 잘 먹는지 그런 거 잘 알 거 같아서 물어볼라구 그랬는데......" "그걸 그 여자가 어떻게 알아?" "왜요? 민우씨랑 살림까지 할려구 했다면서 그것두 몰라요?" "어이, 상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침 떼지 말아요, 다 들었어요." "어허, 이거 사람 환장시키는구먼. 누가 상미에게 그런 유언비어 통신을 보냈는지 모르지만 정말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지 말라구. 이 순진한 남자 가지구 말이야......" "순진한 남자 다 죽었나부죠." "아냐, 정말이야, 그 여자하고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구." "그럴 거예요. 뭐 자기는 여자라구는 내가 처음이구 여자 손목 한 번 잡아본 일이 없을 테니까요." "야, 이거." "그래요, 현장을 들켜두 죽어두 오리발을 내밀어라...... 그게 남자들이니까요." "상미가 남자에 대해 잘 아는가부지?" "어머, 정말 그렇게 업어치기하실 거에요?" "아냐 아냐,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다구. 이거 우리 신혼 첫날부터 이렇게 티격태격해야 쓰겠어?" "오늘은 첫날이니까 봐 줄께요. 우리 어디 가서 국수나 한 그릇 먹어요." "국수?" "그래요, 절약해야 되잖아요." 상미의 말에 따라서 그들은 시장 닭집 옆에 있는 좌판으로 갔다. 뱀처럼 둘둘 말려서 감겨 있는 순대에서 흰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고, 군대 텐트천으로 만든 자크 달린 돈주머니를 앞자락에 차고 있는 시장 사람들이 길다란 쪽나무 의자에 앉아서 삼백 원짜리 만두국이며 칼국수 냉면을 맛나게 먹고들 있었다. "뭘 드릴까?" "우리 국수 주세요......" 국수를 먹으면서 상미가 말했다. "참 여기 장사 잘 되죠? 나도 여기 나와서 장사나 할까요?" "장사? 무슨 장사?" "장사는 뭐니뭐니해두 음식 장사만큼 남는 게 없다구 하니까......" "그래, 상미두 장사할 만큼 잘 만드는 음식이 있어?" "사람 무시하지 마세요. 저두 스파게티 같은 거 얼마나 잘 만든다구요." "그래서 여기 이 시장에다가 스파게티 장사를 벌인단 말이야?" "왜, 안돼요?" 아이구, 강사범은 그저 골이 지끈지끈 아플 뿐이었다. 시장, 와글와글, 좌판, 국수, 장사, 스파게티. 그래 이 아이의 머리 속에는 그런 상념의 끈들이 마치 손가락으로 톡톡 누르면 자동적으로 더하기 빼기를 해대 가지구 푸른 글자가 찍혀나오는 조그만 휴대용 전자계산기처럼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겠지......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환경의 차이일는지도 몰라. "왜, 제가 바가질 긁어서 화났어요? 자기." "아니......" "근데 왜?" "아냐, 아무것두. 그래 집에 전화는 했어?" "응, 아빠하구 통화하긴 겁이 나서 그냥 가정부에게 서울 어느 동네에 잘 있다구만 얘기하라구 그랬어요." "그렇게만 해둬두 우선 안심은 하시겠지......" 그러자 상미가 갑자기 푸푸 웃기 시작했다. "왜?" "글쎄 집에 전활 했더니......" "그랬더니?" "제가 유괴당한 줄 알구서 경찰에 신고를 하느냐 어쩌느냐 그랬대지 뭐예요. 그러니 우습잖아요. 저처럼 커다란 계집애를 글쎄 누가 유괴를 할 수가 있다구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원......" "그래두, 집에서는 일단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구......" "자, 이제 우선 필요한 것 좀 사요." 강사범은 그저 상미의 뒤를 슬슬 따라 다니기만 했다. 한 채의 이불과 베개, 솥, 남비 두 개, 바가지 한 개, 주전자 한 개, 접시 세 개. 상미는 참 악착같이도 그런 물건 하나하나를 살 때마다 십원이라두 깎아 내리곤 했다. "지겟군을 부르죠." "지겟군은 무슨 지겟군, 이 정도면 두 배라도 내가 지구 올라갈 수 있으니까 염려 말라구......" 강사범은 이불보따리와 솥단지들을 양손에 번쩍 들고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올리는 힘센 시지푸스처럼...... 꿈 같은 시간은 겨울을 꺾고 넘어갔다. 지리했던 그 해 겨울은 끝나고 개구리 팔짝 뛰고, 창경원 앞에 삶은 계란장수 붐비는 기미년 삼월 일일이 61주년이 되는 삼월이 왔다. 상미는 그동안 집에다 두어 차례 전화를 더 해서 자신이 유괴된 것도 아니고 가출한 것도 아니며 겨울방학 동안 어른이 되는 연습을 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점만 말했다. 강사범의 일상(日常)은 이제 점차 어엿한 가장으로서 출근해서 도장 수련생들 가르치고, 일찍 귀가하여 소주 한잔 반주로 저녁밥 먹고, 라디오 신문보고, 공화당.신민당 열심히 돌아가는 정치 얘기도 가끔하고, 상미와 나란히 앉아서 고스톱도 치고, 그러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가는 듯 싶었다, 마치......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하는 노래 가사대로 그들은 마주앉아 가난하나마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사범이 그렇게도 염려하고 있던 두렴움의 싹이 마치 철사처럼 겨우내 죽어 있던 개나리 가지에서 노란꽃이 토해져 나오듯이 봄과 함께 눈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날 아침과 다름없이 강사범이 막 조그만 쪽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서려는데 강사범의 앞을 막아서는 우람한 사내들 넷이 있었다. "누구십니까?" 강사범은 온몸을 뻣뻣하도록 만드는 긴장감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그들에게 물었다. "이 집에 전상미양이 살고 있죠?" "네, 그런데요." "지금 계십니까?" "네, 그런데 당신들은......" "당신한테는 볼 일이 없어요. 상미양 지금 있죠?" "네, 그런데." "좀 비키쇼." 그들 중의 하나가 딱딱하게 말했다. 강사범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무슨 기관에서 나온 사람들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하간 당당한 권리를 가지고 상미를 찾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 봐요!" 강사범은 될수록 부드럽게 그들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왔는지 나한테 말해줄 수 없겠소? 상미가 집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애는 내 부인이란 말이오." 강사범이 그렇게 말하자 그들 중의 하나가 킥킥 웃었다. "부인 좋아하네. 마, 네 마음대로 부인이야?" 사내들 중의 하나가 손가락 하나를 강사범의 턱 밑에다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거, 좀 점잖게 못하겠어?" 강사범은 어깨에 힘을 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오랫동안의 경험으로 해서 이미 강사범의 두 발은 적당하게 벌어져 있었고, 해서 언제라도 허공을 차고 날아 올라가 상대방의 턱을 우지끈 뚝딱 으깨어 놓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어쭈?" "지가 태권도깨나 했다 이거지......" 그러나 그들은 강사범의 기세에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고 그렇게 이죽거렸다. "어이, 그 친구하고 다툴 건 없어......" 사내들 중에서 지휘자인 듯한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상미양 계시죠?" 그때 바깥의 수상한 기척을 느낀 상미가 고무장갑을 낀채로 문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상미가 흰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 채로 거기 나타나자 여태까지 도둑놈을 잡으러 온 형사처럼 강사범의 앞에서 으르딱딱거리던 그들은 상미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누구시죠?" "네, 저 호텔 영업부에서 일하고 있는 박과장입니다. 회장님이 아가씨를 모셔 오라고해서 이렇게 왔으니까 준비하고 나오시죠." "그럼 아빠가......" "네, 그간 아버님께서 아가씨 전화를 받으시고는 아가씨 행방을 찾느라고 무척 애를 쓰셨죠 저희들도 고생 많이 했구요." "돌아가세요." "네?" "가서 아빠한테 며칠내로 그이와 함께 찾아 갈 테니까 기다리시라고 말씀해 주세요, 지금은 안돼요." 상미가 그렇게 잘라 말하자 과장이라는 사내가 썩 앞으로 나섰다. "저희들은 무조건 아가씨를 모셔오라는 회장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요?" "저희들도 그간 조사를 통해서 아가씨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의로 이러고 계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회장님이 직접 오시지 않고 저희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강제로 끌고 가겠다 그런 말인가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희들은 단지 회장님 말씀대로 일단 아가씨를 모셔가겠다 이겁니다." "그거나 저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아가씨, 이러시면 저희들이 곤란해집니다." "제가 여기 있는 걸 아셨으니까 아빠가 절 만나러 오실 거예요. 그러니 오늘은 그냥 돌아가세요." "아닙니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시겠습니까. 사정이 이런 걸 잘 아시니까 저희들을 보내신 거 아니겠습니까. 저 밑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으니까 어서 가시죠......" "댁에들한테는 회장님이지만 저에게는 그냥 아빠예요. 그러니 집안 일에 참견하지 마시고 그냥 돌아가세요." "아닙니다, 아가씨......" "그럼 맘대로 해보세요. 민우씨, 저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저 사람들 보내 버려요." 상미는 그렇게 말하곤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강사범은 난감했다. 언젠가...... 그래,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강사범의 상상 속에서는 조금 부드러운 것이었다. 영감님이 아무리 반대를 하셔도 상미는 보시다시피 이렇게 제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불결하게 보지 마시고 내버려둬 주십시오. 저는 상미의 집안이 모두 거렁뱅이라 할지라도 아니 문둥병환자라고 하더라도 변함없이 이렇게 상미와 같이 살 작정입니다. 상미가 마음이 변하면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상의 결과는 이렇게 상미 아빠의 대리인들이 커다란 덩치로 나타나므로 해서 졸지에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상미에게 얘길 해볼 테니까요." "부탁합니다." 강사범은 그들에게 잠시 말미를 달라는 부탁을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상미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수도물을 틀어놓고 덜거덕덜거덕 설겆이를 하고 있었다. "상미야, 어쩔래?" "어쩌긴 뭘?" "아빠가 사람들 보냈잖아!" "나, 집에 가라구?" "그럼?" "자기,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둬요. 우리 아빤 말이에요, 참 씩씩해요, 알아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자기가 씩씩하구 남자답게 부딪치면 일이 잘 해결될지도 몰라요. 물론 저는 지금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아요. 아마 아빠는 저 사람들을 여기 보내기 전에 민우씨에 대해서 모든 걸 알아 놓으셨을 거예요, 사업가니까요. 그래서 판단을 하신 거예요. 가망없다, 내 딸을 이러이러한 사람에게 투자를 하는 것은 발전적인 사업이 아니다. 그렇게 판단하신 거예요. 그래서 저 사람들을 보낸 거예요. 내 고집을 아시니까,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니까,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 나를 보고 자기 고집이 꺾이실까 봐 겁이 나니까 사람들을 보내신 거예요. 무슨 얘긴지 아시겠어요? 내가 아들이라도 하나 낳으면 제일 좋아하실 분이 우리 아빠거든요. 그때가 되면 아빠가 우리를 설득하러 오실 차례가 될 거예요. 그치만 아빠는 강한 분이시라 쉽게 설득당하진 않으실 거예요. 부러지면 딱 부러지셔두 휘지는 않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요는 자기가 얼마나 강하게 나가느냐에 달려 있어요, 아시겠어요. 난 이미 자기 거니까요. 뺏기고 싶지 않으면 강하게 나가셔야 돼요. 물론 지금이라도 민우씨가 내가 싫어서 나가라구 하면 나가겠지만요, 아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상미의 볼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여태껏. 맞아, 여태껏 내가 긴 생애를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태 살아 오면서 나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들풀처럼 어디에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여자는 마치 기타줄처럼 팽팽한 정신을 가지고 있군, 손마디로 이곳저곳을 짚을 때마다 다른 소리를 내면서도 그리고 언제나 단단하게 당겨져 있어 여문소리를 내는 기타줄...... 내 사랑. "알았어...... 당신 각오가 그렇게까지 단단한 줄은 몰랐어......" "글쎄 그렇다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괜히 재벌 딸들이라고 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다니까요." "나, 나갈께......" "그 사람들 많이 다치게 하지 마세요." "오케이......" 이제 큰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태껏 이불 속에서 염려하고 두려워할 때와는 달리 막상 눈 앞에 그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자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다. 죽음처럼. 강사범은 입을 꽉 다물었다. 군대에 가기 전에 군대에 대해 들어온 그 많은 말들. 위험과 두려움. 그러나 막상 들어가서 훈련을 받아보고 생활을 해보니까 그건 강사범처럼 어둠과 배고픔 속에 지네온 사람에겐 일단 아주 안온한 집단이었던 것처럼, 여태껏 염려해 오던 일들도 그렇게 견디어 나가보자, 그렇게 강사범은 일단 결정했던 것이다. 상대가 강하다면...... 상대가 권리와 의무를 가졌다면...... 나는 사랑을 가졌고, 의지와 지탱할 수 있는 벽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 얘긴 잘 됐습니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들 중의 고참이 물었다. "그냥 돌아가셔야 하겠습니다." 그들로부터 몇 발짝 의식적으로 떨어져 서서 공격과 방어에 있어서 최고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다음에 강사범은 늠름하게 그렇게 말했다. "안되겠는데." "이게 운동을 좀 했다구......" 아무래도 그들은 상미를 데려갈 수 있다는 의무와 권리 때문에 이쪽을 얕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봐......" 강사범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시작했다. "난 곱게 부모가 먹여주는 밥 얻어 먹으면서 취미삼아 폼삼아서 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알아 듣겠어? 그리구 이건 내 부인과 내 부인의 아버지와 나 사이에 해결돼야 할 집안 일이란 말이야, 그러니 곱게 돌아들 가셔. 나, 이 강민우 말이야, 고아로 태어나서 남의 주먹에 얻어맞아서 이만큼 부푼 사람이야. 알아듣겠어?" "그래서 막아서겠다 이거야?" "월급 몇푼 받아가지구 치료비될까 모르겠네......" 그들 중의 두 사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가섰다. "좋아, 정 그렇다면......" 강사범은 그렇게 내뱉으며 몸을 공중에 날리면서 팽이처럼 발을 돌렸다. 회전 돌려차기였다. 그러나 발끝에 묻어오는 감각이 없었다. 강사범은 블록 벽에 등을 붙였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벌어지는 것이라면 저들에게 순순히 상미를 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이, 생각을 좀 잘해 보시지 그래!" 고양이처럼 어깨를 구부리고 있는 강사범에게 사내 중의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강사범은 입을 열지 않았다. 횡포. 그렇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해서 <가진자>의 횡포였다. 만일 상미의 아버지가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사람이라면, 아니 얌전한 책방 주인이라면 자기의 딸과 몰래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청년에게 이 따위의 우락부락한 사내들을 보낼 리 만무한 일이리라. 강사범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자 그렇게 버젓한 온 세상을 향하여 발톱을 세우는 짐승처럼 화를 내기 시작했다. 사내들도 이게 아무래도 설렁설렁 말을 해가지고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 결론을 얻었는지 벽에 붙어 서 있는 강사범을 향하여 한발, 한발 다가왔다. 상대는 셋이었다. 허허실실(虛虛實實). 그들이 서로 눈을 맞추어 한꺼번에 공격을 해 오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강사범은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사범은 갑자기 왼손으로 자신이 붙어 서 있는 벽을 탁 쳤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왼쪽의 사내가 일직선으로 주먹을 뻗어왔다. 강사범은 허리를 슬쩍 낮추어 그 주먹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정면에서 왁 달려드는 사내의 명치에 꽉 쥔 정권을 허공에 쭉 내뻗었다. 잠시 순간적으로 틀어지는 강사범의 오른쪽 뒤꿈치에 한 사내의 턱이 정확히 부딪쳐 왔다.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넘어지는 두 명의 사내를 보면서 강사범은 가벼운 걸음으로 두어 걸음 사내들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어차피. 그래. 어차피 이들이 칼을 빼들거나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우악스럽게 결판을 내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리라는 것을 강사범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들은 그들의 말마따나 조사해 볼 만큼은 다 조사를 해 본 다음에 쉽사리 상미를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 번쯤 겁을 줘보려고 했을 테니까. "그냥들 돌아가십시오. 가서 당신네 회장에게 말하십시오. 이렇게 치사한 방법을 동원한다면 영원히 딸을 못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구 말이요." 강사범은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있는 두 명의 사내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당당하던 기세가 한풀 꺽인 그들은 이제 다시 싸움을 걸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게 무슨 짓들이야!" 그렇게 일갈하면서 나타난 사나이. "아, 네, 이 친구가 하도 거세게 나와서......" 사내들이 그 남자 앞에서 그렇게 우물거리고 있었다. "아니, 아가씨를 모셔오라구 했지 누가 자네들 보구 싸움판을 벌이라고 했나? 그런 주제에 왜 주먹은 함부러 내둘러?" "죄송합니다." "자네들 저만큼 내려가서 대기하고 있으라구. 아, 이거 강군, 오랜만입니다." 그 중년 남자가 그렇게 너스레를 떨면서 강사범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누구 으르고 엿 먹이는구먼, 하는 생각에서 마주 손을 내밀고 있지 않던 강사범은 그러나 그가 어디서 많이 낯이 익은 사람 같았다. "저, 누구신지?" 아직도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강사범이 물었다. "아, 왜, 절 모르겠습니까? 지난 가을에 우이동 파출소에서 만났던 최변호사올씨다." 변호사. 강사범은 입맛을 다셨다. 주먹. 법. 그 다음은 돈일까? 어째서 이 삶들은 모든 문제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려고 드는 것일까. 뒷조사를 찬찬히 해 보니까 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다손 치자. 그래 그런일을 꼭 이렇게 어떤 배경을 내세워서 해결을 하려고 해야 하는가. 처음엔 우락부락한 폭력을 동원하고 그게 잘 안될 듯 싶자 이젠 법을 몰고 오는군. "그러세요, 오랜만입니다." 강사범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온몸의 맥이 탁 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도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더 상미를 지켜낼 수가 있단 말인가. "아가씨 지금 방에 계시죠?" 변호사의 말에 강사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 그것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설령 완력에 무릎을 끓고 피를 흘린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몸에 배어 있으니까 주먹 따윈 겁나지가 않았다. 돈? 그쪽도 한 푼도 두려울 건덕지가 없었다. 저녁에 막국수 한 그릇밖에 사먹을 돈이 없어도 하늘이 푸르고 날씨만 깡깡 춥지 않다면 느긋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항시 가지고 있었으니까. 법! 그렇다. 법에 관해서는 강사범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돈이 없고 빽이 없으면 하찮은 일을 가지고도 인생의 이력서에 지울 수 없는 붉은 흔적을 가지게 된다는 것밖에는 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변호사는 잠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강사범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강사범은 그렇게 말하고 쪽문을 두드렸다. "그 사람들 다 갔어요?" "응, 변호사가 오셨어......" "변호사요?" 쪽문이 열렸다. "누추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아가씨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찾느라구 여간 애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셨을 거예요. 좌우간 잠시 들어오세요." 그렇게 말하는 상미의 표정은 냉랭했다. 좁은 방에 그들 셋은 나란히 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벽시계에서 찰칵거리는 초침소리가 그 침묵의 사이사이를 토막내고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재혼도 하지 않으시고 아가씨 남매만을 키우고 있는 회장님 생각도 하셔야죠......" 변호사가 먼저 침묵을 깨고 그렇게 말했다. 상미는 그냥 눈을 새초롬히 내리깔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강사범은 문득 그 말 속에서 한 가지의 비밀을 알 수가 있었다. 여태까지 한번도 상미가 엄마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의문에 대해서 또 한마디도 상미에게 그런 말을 물어본 일이 없다는 일을...... "아빤...... 편안하세요?" 상미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그렇게 말했다. "어째, 편안하시겠습니까, 몸이야 괜찮으시지만 마음이 어떻게 편안하시겠냐구요. 회장님 생각도 좀 하셔야지 어떻게 아가씨 생각만 하십니까. 여러말 드릴 것 없이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다. 아, 그런 다음에 어떻게든 회장님을 설득시켜 가지고 일을 순리대로 처리할 생각을 하셔야지 이렇게 하고 계시면 되겠습니까?" "최변호사님 생각에는 우리가 회장님, 아니 아빠를 설득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상미가 눈을 똑바로 뜨고 그렇게 변호사에게 물었다. "글쎄요, 당분간은 어렵지만 하옇든 어떻게 해서라도 회장님을 설득해서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되지 않겠어요?" 최변호사라는 사람은 법(法)을 다루는 사람답게 순리(順理)대로 화합(和合) 분위기 조성 따위의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말들이 요새 유행하는 말들이었다. 강사범은 그들 중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자신은 마치 재야(在野)에 밀려나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제가 무조건 백기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서 가족의 일원이 돼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네?" "전 아버지를 잘 알아요. 제가 일단 집에 들어가고 나면 아빠는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가 이이를 다시 만날 수 없게 만드실 거예요. 강제로 불란서엘 보낸다거나 하는 수법으루 말이에요. 최변호사님 만큼이나 저도 아빠를 잘 알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아빠가 저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확고부동한 이유를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그게 뭡니까? 혹시 그동안에 결혼 신고라도 해 놓으신 건 아니실 테지요?" "그게 겁이 나세요?" "아뇨, 그런 건 제 힘으로두 얼마든지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실 거예요, 그런 건 아니예요. 아뭏든 돌아가세요." "정말 저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시지 않을 겁니까?" "싫어요. 저에게도 확실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전에는요." 그러자 최변호사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몹시 답답해서 죽을 지경인 속마음 그대로 뻑뻑 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칼날 같은 대꾸만을 해 대고 있는 상미. "알았습니다. 그럼 저도 제 나름대로 아가씨가 돌아오시도록 분위기 조성을 해보겠습니다." "무슨 뜻이죠?" "아가씨가 말씀을 안해 주시는데 저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그건 우리 피차 하나씩 숨겨놓고 있는 카드로 칩시다." "좋아요, 마음대로 해보세요......"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최변호사는 그렇게 물러갔다. "상미 참 대단하군......" "뭐가요?" "변호사라는 사람이 말 팔아먹고 사는 사람일 텐데 상미하구 마주앉아 있으니까 꼼짝을 못하더군...... 그런데 그 친구가 상미가 집에 돌아오도록 분위기 조성을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글쎄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 "뭔데?" "글쎄요, 아마 우릴 못 살게 군다는 뜻이겠죠?" "어떻게?" "그걸 말 안하려구 하던데요......" [그리구 또 한가지 궁금한 게 있어. 아까 최변호사하고 상미하고 얘기하는 중에 말이야 상미가 아빠가 우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확실한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이야?" "궁금하세요?" "그런데......" "그럼 나가요." 상미가 그렇게 말하면서 앞에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었다. "혹시 결혼 신고하는 거 아냐?" "아니......" 7. 커튼 속의 不安 봄은 그 산동네에도 어김없이 찾아들고 있었다. "어머, 저기 좀 봐요!" 상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까 석달 열흘 겨우내 감지 않은 머리결처럼 뻣뻣한 모습으로 돌담에 늘어져 있던 개나리 가지에서 거짓말같이 노란꽃들이 활짝 피어나 있었다. "참 예쁘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창경원에도 벚꽃이 활짝 피겠죠? 그럼 우리 김밥 말아가지구 밤벚꽃놀이 구경가요." "가지 뭐 그까짓 거......" 정말 사방에 봄의 모습이 완연했다. 아이들이 골목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모여서 줄넘기랑 딱지치기를 하고 있었고, 바람이 윙윙대는 그 겨울내내 해소기침으로 콜록거리던 노인네들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서 햇빛 사냥을 하고 있었다. 햇빛은 어디에도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으며 길을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잠시 찌든 가난을 잊은 환한 표정들이 엿보이고 있었다. "대망의 팔십년대 아니에요?" 무엇인가 모르게 상미는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침부터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난 강사범의 마음은 상미처럼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다.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악마가 그처럼 환한 봄볕 뒤의 커튼 너머에서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물가는 미친 듯이 오르고 대망의 팔십년이라, 말은 그럴 듯하지만 글자가 하나 잘못된 거 아냐?" "어떻게요?" "큰 대자 망할 망자루 말이야......" "아이, 왜 그렇게 생각해요? 희망을 가져야지요, 희망을......" 상미는 그렇게 아이들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아까 얘기하던 거 말이야, 상미가 확실한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거 그거 무슨 얘기야?" "아이 김새게 자꾸 묻지만 말고 따라오기나 해요. 기대 하시라, 개봉박두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강사범은 그래서 더 이상 그 문제를 가지고 상미에게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언덕길을 다 내려오자, 거기는 학생들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었다.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수염이 더부룩한 복학생, 아직 단발머리가 채 자라지 않아서 첫눈에 봐도 햇병아리 신입생티가 나는 여학생들이 흰 운동화를 깨끗이 빨아신고 날렵한 몸짓으로 걷고 있었고, 새로 ROTC에 입단한 3학년 학생들이 저멀리서 이년차 선배만 얼핏 눈에 띄었다 하면 거리가 들썩들썩할 정도로 <승전!> 하는 구호를 깜짝 놀라게 외치면서 경례를 붙이곤 했다. 방학 내내 조용하던 막걸리집에서 우짝우짝하는 노래소리들이 들리고 있었다. "개학을 하니까 여기도 번화가군요." "그럼, 그런데 상민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 "학교요?" "그래, 학교." "그냥, 친구들이 보고 싶을 뿐이에요, 언제 한 번 집으로 초대를 하죠 뭐......" "방이 좁아서 어떻게 초대를 해?" "더 좁아지기 전에 초대를 해야 할 꺼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조금 있으면 알게 돼요, 자 어서 들어가요." 상미가 어느 건물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서 강민우의 팔을 잡아 끌었다. 강민우는 얼른 간판을 쳐다보았다. 산부인과. "아니, 상미, 그럼?" "아직 확실한 건 모르겠어요. 아이 챙피해요, 얼른 들어가요." 얼떨결에 강민우는 상미를 따라서 이층 계단을 올라갔다. 소독냄새가 싸하니 코에 스며왔다. "자,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요. 저 진찰하구 올 테니까요." 그래. 이제야 알 것 같군. 최변호사 앞에서 집에서 우리를 확실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상미의 말을 강민우는 그제서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사이에 벌써 아기가 생길 수가 있단 말인가? 참 신기하군. 아들일까, 딸일까. 날 닮았을까, 제 애미를 닮았을까. 아니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다 틀림없이 달려서 나올까?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하나. 내 월급 가지고 상미랑 꼬마랑 다 먹여 살릴 수가 있을까. 이젠 그나마 담배두, 소주 한잔 마시는 것두 아기를 위해서 끊어야 하겠군.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강민우는 속으로 한 가지의 약속을 자신의 아기에게 하고 있었다. 아가야. 내가 많은 돈을 벌어서 너를 호강시켜 주지는 못할 게다. 그러나 단 한가지, 너에게 이 아비와 같이 홀로 이 세상에서 잡초처럼 고아로 살게 하지는 절대...... 절대로 그렇게는 만들지 않겠다. 아가야. 그리하여 내 이 튼튼한 팔에 뛰어 들어와서 네가 언제라도 아버지 하면서 펑펑 울 수 있도록, 아가야 난 너를 지키겠다. 진찰실에 들어간 상미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배가 둥그렇게 부른 아주머니 둘이 허리를 두드리며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강사범은 연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첫 애깁니까?" 강민우의 초조한 모습을 지켜보던 배부른 아주머니 하나가 그렇게 물었다. "네, 첫애깁니다." "진통이 오래 끄나 보죠?" "네? 아, 아닙니다." "그러문요? 무슨 고장이라두......" "아닙니다. 오늘 처음 진찰을 하러 왔습니다." "난 또, 지금 애를 낳는 중이라구? 에이 젊은 양반, 진짜로 애를 낳을 땐 어쩌려구 이제 처음 진찰인데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거유?" 강사범은 옆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의 그런 핀잔에 절로 얼굴이 빨개졌다. 상미가 나왔다. "뭐래 상미, 아들이래?" "아이, 이이는......" "허, 답답하구먼, 말 좀 해봐......" "임신 아니래요." 상미가 그렇게 짧게 말했다. "아니라구?" "그렇대요, 난 몹시 기다렸는데......" "그야 나두 기다렸지......" "자기가 언제 기다렸어요? 오늘 내가 말할 때까진 그런 얘긴 비치지두 않구서......" "아냐, 난 한 삼 년 같이 살아야 애기가 생기는지 알았다구......" "삼 년이 아니라 삼일만 같이 살아두 생기려면 생겨요. 그만 도장에나 나가보세요. 전 시장 가서 찬거리나 좀 사가지구 올라갈 테니까요." "그래, 몸 조심해, 조심하라구......" "아이 애기가 아니라는데요 뭘......" "그래두, 조심해......" 조심해, 조심하라는 소리를 강민우는 몇번이나 되풀이했다. 시장께로 가고 있는 상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강민우는 마치 그녀가 폴싹 어디론가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느낌을 떨어버릴 수가 없었다. 도장은 평온했다. 대학이 문을 열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온 수련생들이 많이 붐비고 있었다. 한 클라스를 더 만들어야 할 판이었다. 강사범은 도복으로 갈아입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몸은 도장에 있었지만 강사범의 마음은 산동네 꼭대기에 있는 그 조그만 방, 상미의 옆에 가 있었다. 수련생들을 지도하느라고 땀을 흘렸지만 강사범은 몸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혹시. 나 없는 사이에 아까처럼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와서 상미를 끌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불안은 며칠 동안 끈질기게 강사범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강사범은 틈만 있으면 도복차림으로 산동네 꼭대기까지 상미의 안전을 확인하려 뛰어 올라가곤 했다. 마치 버릇 나쁜 고양이를 옆에다 두고 작은 어항 속에다가 물고기를 기르는 것처럼 불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변호사가 한 번 더 상미를 설득하러 찾아왔을 뿐 별다른 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 불안은 엉뚱하게도 이상한 모습으로 강사범앞에 그 검은 날개를 펄럭이면서 나타났다. 오후 마지막 클라스에 훈련을 막 끝냈을 때 사장이 도장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오후 늦게 웬일로 오셨습니까?" "응, 자네에게 좀 의논할 일이 생겨서 이렇게 왔네......" 강사범은 우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장이 도장에 나타날 때마다 강사범은 가슴이 내려앉곤 했다. 그것은 어쩌면 피고용인이 고용인에게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불안(不安)의 도(度)를 넘어선 것이었다. "다방에나 갈까?" 지금 강사범은 사장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청룡관과 관계된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단순히 시찰차 들렀다면 도장의 입금 여부를 확인하고 청소상태가 불량하다든지, 또는 상투적으로 수련생을 더 모을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는 얘기든지, 이것도 도장 월세 주고 나면 별반 남을 것도 없다는 투정이나 하는 것이 보통 때의 사장의 태도였던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트레이닝 옷으로 갈아 입으면서 강사범이 다시 한번 그렇게 물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사장은 대답이 없었다. 다방으로 내려가서 코피를 시켜놓고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강사범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개학이 돼서 클라스도 한 클라스 늘고 했으니까 그런 대로 이 근처에서는 운영이 잘 되는 폭입니다." 강사범은 우선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야 뭐 자네가 애쓰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만......" 사장은 자꾸 그렇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해 주십시요." "이 도장도 못해 먹겠어......"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사장이 그렇게 말했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일 것이라고 예견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강사범이 염려하고 있던 것보다는 훨씬 더 강도가 센 어떤 일인가 보았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장님이 가지고 계신 세 군데 도장에서 그래도 이쪽이 제일 운영이 잘 되는 폭 아닙니까?" "자넨 한 가지만 생각하니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지......" "네?" "자네가 생각하는 것하구 운영자인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하구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그런 말일세......" "네, 알아 듣겠습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요새 유가 인상이다, 환율인상이다, 해서 부동산 경기가 많이 올랐지 않는가?" "그래서 건물 주인이 또 전세돈을 올려 달라는 겁니까?" 하긴 그랬다. 뭐 한 가지라도 안 오르는 게 없는 형편이니까 건물 주인이 전세나 월세값을 올리겠다고 덤비는 것을 일방적으로 탓할 계제는 못 되는 일이었다. "차라리 그런 일이라면 운영도 잘 되니까 어떻게 해볼 수가 있는 일이네만 이번엔 건물 주인이 통째로 바뀌어 가지구 새로 들어온 사람이 뭘 해보겠다는 거야......" 그건 정말 큰 일이었다. "그럼 결국 도장을 옮겨야 되나요?" 강사범의 질문에 사장은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강사범은 사장이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음을 알았다. 얼굴에 나타난 표정 저 깊은 밑바닥에서 또하나 흐르고 있는 마음의 한줄기. 고아원을 시찰하는 사람들이 오기 며칠 전부터 갑자기 친절해지던 고아원 원장의 그 표정. 검은 신부복을 입은 예수님의 사도 앞에 때가 까맣게 뭍은 검은 손에 들린 껌 한통을 내밀 때 상대에게서 피어오르던 그 억지 미소. 가슴 가득히 연기처럼 스며나오는 살기(殺氣)를 감추던 맨손. "사장님, 뭔가 저에게 말씀하시기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강사범이 거푸 그렇게 묻자 사장은 아주 곤란해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어차피 제가 알고 있어야 될 일이라면 일찍 아는 편이 낫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담배를 빼어물면서 사장이 입을 열었다. "난 처음에는 그냥 건물 주인이 바뀐 줄만 알았어. 그래서 별거 아니려니 하는 식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일세. 왜냐하면 그전 건물 주인과 장소 임대계약을 한 게 아직 석 달이나 남아있으니까 아무리 건물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경우에 없이 나가라는 소리를 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말씀이야. 또 전 주인과의 계약기간이 다 만료되면 새 주인이 전세보증금을 시세에 따라서 좀 올리든가 아니면 월세를 좀 더 달라고 할 줄말 알았지.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요샌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곤두박질로 오르는 세상이니까 건물 가진 사람들도 물가 상승에 따라서 돈을 더 달라고 할 건 사실이란 말일세. 그래서 별다른 문제가 없으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일세." 사장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잠시 멍한 시선으로 다방 천장을 바라보았다. 레코드판 위를 긁는 낡은 전축바늘이 녹슨 소리를 스피커로 내보내고 있었다. 강사범은 그 소리가 마치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 철길을 못으로 긁어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새 건물 주인을 만났더니...... 아니 주인은 하도 어마어마한 부자라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만나볼 수도 없고 그 사람의 변호사라는 사람이 부동산 관계를 취급하고 있더구먼......" <변호사요> 하고 말하려다가 강사범은 입을 다물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동산 관계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변호사가 따루 있다니까 알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쪽에서 너무 터무니없는 돈을 얘기하는 거야. 이 동네 시세에 세 배쯤을 부르니까 난들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있나?" "그래서 도장을 옮기시기로 한 겁니까?" "글쎄 그랬더니 자네 얘기를 꺼내는 거야. 자네가 그 어마어마한 집 딸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면서?" 강사범은 얼굴이 핼쓱해졌다. 이렇게도 빨리 저들이 휘두르는 채찍바람이 나에게 불어 닥치다니...... 그것은 강사범이 한 번도 상상해 본 일이 없는 괴력이었다. 위대한 힘이었다. 강사범은 순간 자신의 앞에 마치 커다란 바위산이 버티고 서 있는 듯한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그 산에 널려 있는 조그만 자갈 하나라도 굴러 떨어지면 자신은 마치 커다란 거인의 구둣발에 밟힌 것처럼 찍소리도 할 수 없는 조그만 일개미처럼 느껴졌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듣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도장에서 물러나야 된다는 말씀 같군요. 그러면 저쪽에서도 적당한 가격에 재계약을 해 주겠다. 그렇게 나오는 것이겠죠?" 강사범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말하자 사장이 미안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그만두겠습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지? 그러나 이런 처사는 내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자네가 알아주어야 하네. 자네가 그동안 우리 도장을 위해서 애쓴 것을 생각하면 영등포에 있는 도장에라도 가서 일하라고 하겠네만 그쪽도 내가 전세를 들고 있으니까 언제 또 그치들이 와서 똑같은 식으로 나올지 알 수가 없으니까 어디 불안해서 그렇게라도 해줄 수가 없구먼...... 어찌 보면 자네나 나나 다같은 피해자 아니겠나. 내 자네 퇴직금은 섭섭치 않게 해줌세...... 그나저나 그집하군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렇게 나오는 건가?" 강사범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사장에게 미주알고주알 상미와의 관계를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타협할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자 강사범은 자신도 모르게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타협이라니......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었다. 아마 상미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삼층짜리 건물 하나 정도를 쉽게 사버리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물러선다는 조건을 제시하면 몇 백만원 정도는 거지 밥주듯 쉽게 내던질는지도 몰라. 그러나 상미는 내 하늘. 내 우주. 이 세상에서 상미와 바꿀 수 있는 건 내 몸뚱이 하나뿐. 내 혼백이 꽃그네에 실려서 죽음의 세계 저편으로 훌훌 날아오를 때까지 그녀는 내 사랑, 내 느낌, 내 영광...... "알았습니다 사장님, 내일이라도 도장 일을 정리하겠습니다." "미안허네." 사장이 손을 내밀었다. 강사범은 그 사장의 손을 꾹 잡아주고 다방을 나왔다. 골목에는 사방의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학생들의 노랫소리로 출렁이고 있었다. 마치 한겨울 내내 꽝꽝 얼어붙어 있던 유원지에 상춘객이 들끓듯 자유와 진리, 그리고 학문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예년과는 그 깊은 의미가 이 봄을 맞이하여 그 모든 것에 흠씬 취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잔. 강사범은 천천히 큰못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골목에서도 불끈불끈 피어오르는 젊음의 울분이 지분 냄새나는 아가씨의 치마자락으로 외롭게 밤을 지키고 있는 가로등의 뿌연 불빛 밑으로 밝게, 또 때로는 우울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살롱 금자갈.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강사범은 순간 잠시 망설였다. 아주 탁한 공기를 맡고 싶은 마음. 신선하고 여린 풀잎이 모여 있는 아침 산보다는 썩은 하수구를 멀거니 들여다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문을 열고 강사범은 터덜터덜 지하실로 내려섰다. 지하실이 갖는 그 특유의 칙칙하고 후덥지근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학생들이 두어 패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강사범은 카운터에 앉아 있는 장미마담에게 그렇게 인사를 했다, 장미마담은 싸늘한 눈초리로 고개를 까딱해 보일 뿐 말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사범은 빈 테이블에 풀썩 앉았다. "얘, 손님 오셨다. 가 봐라." 장미마담이 카운터에 앉은 채로 악을 썼다. 픽 웃음이 나왔다. 여자란 저런 것일까? 자신과 살을 몇 번씩 섞은 남자에게도 전당포 주인처럼 칼날 같은 표정으로 모른 체할 수가 있을까? 아냐. 고아원 원장처럼, 아까 그 도장 사장처럼 저 여자도 마음의 비밀창고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몰라. 그렇다면 상미의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일본 가서 기껏 돈 벌어가지고 고향에다가 한다는 짓이 독립문보다 더 높은 돌문을 세우고 겨울에는 보일러, 여름에는 에어컨장치가 되어 있고, 내려가는 계단에는 에스켈레이터를 해놨다던가 하는 그 미친 재일교포처럼 자신의 호화 무덤이나 몇 억씩 들여서 만드는 그런 사람일까? 아니면 떡보다는 떡고물을 더 좋아하는 식성을 가진 사람일까? "무슨 술을 드릴까요?" 젖가슴이 나바론의 건포도, 아스팔트 위의 뻔데기, 벽에 붙은 껌처럼 조그만 처녀 아이가 와서 물었다. "제일 독한 술이 뭐지?" "위스키요." "그보다 더 독한 건?" "제가 위스키보다 더 독한 술을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좋지......" "안주는요?" "통북어나 하나 주지 뭐......" 처녀아이는 잠시 후에 위스키 반 병과 맥주 한 병을 가지고 왔다. "정말 독한 술 마시고 싶으세요." "글쎄 그렇다니까!" "그럼 위스키 컵 하나 값을 더 내셔야 해요." "좋아 까짓거 나중에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그러자 처녀 아이는 갸량갸량한 위스키 잔을 들더니 그 가는 목을 상모서리에다 톡 쳤다. 그러니까 그 잔은 금방 가는 목과 그 밑을 받치고 있는 둥그런 자리가 없어지고 술을 담을 수 있는 윗부분만 남게 되었다. 처녀 아이는 거기다가 위스키를 한잔 따르더니 그걸 맥주잔 안에다가 집어 넣었다. 그런 다음에 맥주를 맥주잔에 달랑 들어앉은 위스키 잔의 높이만큼 따라서 강사범 앞에 내밀었다. "이렇게 마시면 빨리 취하나? 이거 뭐 쏘맥하고 같은 방법 아냐? 위스키 한잔 마시구 맥주 반잔 마시는 것과 이거 하구 어떻게 다르지!" "모르시는 말씀, 아 그렇게 따진다면 왜 비빔밥이 생겨났겠어요? 맨밥 먹구서 반찬 집어먹어두 뱃속에 들어가면 다 마찬가지라면 왜 비빔밥이 생겼겠어요?" "그것도 그렇군......" "그게 다 무드라는 거예요. 술집 빠순이나 창녀나 댁의 부인이나 벌거벗고 나면 다 같은 여자 아니겠어요? 그런데도 남자들은 탈렌트들이 나오는 요정에 가서 몇십만 원어치씩 술을 먹잖아요, 안 그래요 아저씨?" "허허, 구구절절이 공자 앞에서 논어만 읽으시는군......" "그래도, 아저씨. 식모 앞에서 행주짜구요, 엄마 앞에서 짝자꿍이지요, 자 어서 드세요......" 강사범은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정말 죽고나면 입만 살아서 동동 뜰 것 같은 그 처녀아이의 말대로 그 술맛은 위스키를 한잔 먹은 다음에 맥주를 섞어 마시는 것하고는 많이 다른 맛이었다. 거푸 그렇게 술을 들이키자 온몸의 뼈마디가 늑작지근해지면서 뱃속이 뜻뜻해졌다. "저는 한잔 안 주세?" "왜, 한잔 하겠어?" "아까우세요?" "아니......" "그럼요?" "그것보다두 가서 마담 좀 이 자리로 잠깐 오라구 할 수 없어?" "아, 아저씨 그러구 보니까 딴 데 눈독을 들이구 계셨군요. 그렇지만 재미없을 텐데......" "잔소리 말고 잠깐 오라구 해!" 강사범이 다시 한번 그렇게 말하자 처녀아이가 마지못해 하는 눈치로 일어섰다. "[절 부르셨어요?" 장미마담이 테이블 옆에 선 채로 그렇게 물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녀는 길다란 검정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왼쪽 가슴에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꽂고 있었다. 해서 그녀는 강렬한 색깔을 한 장미의 숲 저건너로부터 젖어오고 있는 깊은 밤바다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좀 앉아!" 강사범은 힘없이 그렇게 말했다. 온몸에 골고루 퍼져드는 알콜 때문인지 실내를 미끌거리고 있는 음악과 웃음소리, 술잔이 딸깍거리는 소리 등이 한 겹의 얇은 커튼 저편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흔들거리는 것은 강사범의 귀에 들어오는 그런 자잘한 소리들이 아니라 자신의 발과 손과 그리고 눈이었다. "그 당돌하고 꽃 같은 아가씨는 어쩌시구 이렇게 혼자 오셨어요?" 그러나 장미마담의 얼굴은 조금도 비뚤어지지 않은 채였다. 온몸으로 달려들던 여자. 그리하여 사내가 몇번씩 여자의 몸에서 긴 한숨을 토하고 나올 때까지 남자와 온 우주를 자신의 몸 안에 넣고 흔들던 여자. "그날은 참 미안했소." 강사범은 그녀의 앞에다 위스키 잔을 내밀며 말했다. "새삼스럽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다 그런 거 아니예요?" 다 그런 거지, 뭐 그런 거야,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냐, 다 그런 거지 뭐. 한쪽에서는 망원경 달린 엽총을 빵빵 쏘고 다니면서 노루피 벌컥벌컥 마시고, 한쪽에선 라면 끓여먹으면서 보초서고, 한쪽에선 돼지똥 강물에 흘려 보내고, 한쪽에선 눈 부릅뜨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다 그런 거지...... "그 꽃 같은 아가씨 때문에 이렇게 내 몸이 세상 속으로 가라앉는구려......" 강사범은 그렇게 중얼대면서 장미마담의 술잔에다 위스키를 따랐다. 소주란 술이 불빛 속에서 맑고 투명하다면 그 술은 색깔에서부터 부티가 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콩나물 먹고 코피 마시는 입맛으로 된장 먹고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이 근처에 딱 하는 소리 나는 거 못 들으셨어요?" 술잔을 두 손가락으로 돌리기만 하면서 장미마담이 그렇게 말했다. "딱 하는 소리?" "그래요, 그게 바로 제가 술 끊는 소리였어요." "붕어가 물 안 먹구도 살 수가 있나?" "글쎄요, 견디면 되겠죠." "옛날에 말이야 어떤 사람이 집에서 붕어를 기르고 있었대요, 물론 어항에다가 수초도 넣어주고 물레방아두 만들어주고, 뽀그르르 산소도 넣어주구 하면서 그 붕어를 애지중지하면서 길렀다는 거야. 그런데 아무리 붕어를 사랑해 봐두 붕어는 역시 붕어가 아니겠어? 왜냐하면 붕어는 어항 속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물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말이야. 그래서 그 사람이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대요. 붕어의 등지느러미를 잡아서 살짝 물 밖으로 들어냈다간 얼른 다시 물속에 넣어주고...... 그러니까 제일 처음에는 일초의 몇분의 일쯤만 물 밖으로 꺼내 놓았다가 그 시간을 점차 늘리기 시작했다는 거야. 오 분, 십 분, 이십 분, 그렇게 자꾸자꾸 훈련을 시키니까 나중에는 이 붕어가 정말 물 밖에 나와서 살 수 있게 됐대요. 그래서 어느 날 그 사람은 점잖게 붕어 목에다가 끈을 달아서 강아지처럼 데리고 산보를 나갔다가 마침 개울가로 가 가지구 징검다리를 건너게 되었다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과 붕어가 깡총깡총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붕어가 실수를 해 가지구 텀벙 냇물에 빠졌대요. 그러니깐 그만 붕어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거야......" 강사범은 그렇게 말해 놓고 킬킬 웃었다. "그게 작년에 세계 거짓말 대회에서 이등을 먹은 거짓말 인가요?" "자, 그러니까 한잔 마시라구......" "정말이에요. 저 술 끊었어요." "허허 마시라니까......" "싫어요......" "마셔......" "취하셨나 봐!" "마시라니까......" 그때 강사범의 손목을 낚아채는 손이 있었다. "안 마신다는 사람한테 왜 자꾸 그러는 거야!" 맨손이었다. "어, 맨손 오랜만이야......" "맨손이구 맨숀이구 왜 여기 와서 지랄이야!" 대뜸 그렇게 맨손이 험악하게 나왔다. "지랄?" "그럼!" "이새끼가!" "말조심해 임마!" 맨손이 그렇게 말하면서 강사범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것은 마치 얘, 꼬마야, 왜 그러니 하는 식이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강사범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고만두세요 여보, 그 사람 술이 취했어요." 장미마담이 맨손을 향해서 그렇게 말했다. "여보라구?" 선 채로 강사범은 맨손과 장미마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서 뭐가 잘못됐어?" 맨손이 역시 계속해서 도전적인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강사범은 실실 웃으면서 그렇게 대꾸했다. "강사범, 남자가 앗쌀한 데가 있어야지 야쿠샤판에서 좀 놀았다는 사람이 왜 그래? 한판 승부에 졌으면 깨끗이 나한테 형님하든가 아니면 그게 싫으면 보따리 싸가지구 이 바닥을 떠야지 뭐야, 그 태도가......" 강사범은 맨손의 말에 대답할 여지가 없었다. 그건 그랬다. 줄다리기를 했건, 팔씨름을 했건간에 사내들 사이의 싸움에서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진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할 말 없어. 나 갈께......" 강사범은 장미마담 앞에 따라놓았던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키곤 비척비척 걸어나왔다. "술값 필요없어, 다시 얼신거리지만 말아!" 카운터 앞에서 돈을 꺼내는 강사범의 등뒤에다 대고 맨손이 또한번 그렇게 모욕적인 말을 비수처럼 던졌다. 그것은 정말 끝이 붓끝처럼 뾰죽한 한 개의 붉은 화살이 되어서 강사범의 널찍한 등판에 와서 소리없이 꽂히고 있었다. 카운터에다 만 원 짜리 한 장을 내미는 강사범의 손 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이하랴. 이젠 한마디 짖지 못하는 개처럼 꼬리를 사리고, 저 건너 푸른 보리밭 사이로 그림자를 감추는 상처받은 들개처럼 강사범은 맥없이 그곳을 나왔다. 따뜻하고 푸근한 봄날의 밤이었지만 강사범의 가슴은 휑하니 구멍 뚫려서 술술 바람이 새고 있었다. 상미야, 내 작은 영혼. 강바람에 실려온 수양버들 꽃처럼 사랑으로 밀려와 나를 감싼 그대. 불꽃처럼 태양처럼 내 가슴을 밝히던 그 빛과 영혼은 어느덧 사라져 이제 내 가슴에 차갑게 불어오나니. 저 깊은 강물 속에 잠긴 마을처럼 아득히 흔들리는 내 사랑. 아, 비오는 저녁 플라타너스 둥근기둥을 적셔오는 내 사랑. 상미는 동그란 플라스틱 밥상 앞에 오두마니 앉아 있었다. "웬일이에요. 술을 안 잡수던 양반이 이렇게 취하다니......" "상미야 어쩌면 좋으니?"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냐, 아무것두......" "왜, 그래요. 말해 봐요." "노래를 해줘 상미......" 옷 입은 채로 좁은 방안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강사범은 말했다. "아이, 저녁 먹구 누워야죠." "싫어, 싫다구." "왜 그래요 정말 어린애같이......" 강사범은 상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훈훈한 바람을 분위기 전체로 가지고 있는 그녀의 얼굴, 그윽한 깊이로 깜빡이고 있는 그녀의 눈. "상미 손을 줘......" "아이......" "그러구 노랠 해라, 날 위해서 네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노래를 말이야, 어서......" "정말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은 무슨 일, 어서 노래를 해줘......" "가만 있어요, 상이나 내놓구요." 상미가 부스럭거리면서 일어나 상을 들고 나갔다. 허리를 깊이 숙이고야 드나들 수 있는 부엌으로 통하는 조그만 문, 저 혼자서 언제나 외롭게 짤깎거리고 있는 사발시계. 그 옆에는 상미가 짜고 있는 레이스 수실이 벌레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가난한 삶. 그러나 살아있음의 영광, 지난해 풋풋하게 내리는 눈 속에서 그녀와 가졌던 그 숱한 사랑의 말들. 좁은 방안이 어디론가 이름모를 섬을 찾아가는 밤바다의 배처럼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취했어요?" 상미가 민우의 옆에 다소곳한 자세로 앉으면서 물었다. "그냥 취하고 싶어서지......" "자기가 그렇게 취해서 들어오니까 나두 한잔 마시고 싶어지네요......" "마실까?" "싫어요. 괜히 그저 한 번 해본 소리예요." "상미의 손은 아빠를 닮았나?" 문득 강사범은 그렇게 물었다. "그런가 봐요. 아빠두 저처럼 손이 큰 데다가 엄지 손톱이 이렇게 밉게 생겼걸랑요." "상미는 이손으루 아무것두 죽여보지 못했지?" "무슨 소리예요?" "아냐, 아무것두." 강사범은 상미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 아직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상미 아빠의 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강사범에게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가까이에서 잡아볼 수 없는 커다랗고 불가사의한 태산 같은 손이었다. "불을 꺼라 상미." "싫어요." "왜?" "불을 끄면 자기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우리 언제나 불을 껐었잖니?" "그렇지만 오늘은 싫어요. 불을 꺼버리면 감추어진 자기의 표정을 볼 수가 없으니까......" "감춰진 표정이라니?" "그럼 뭐예요? 자기 무슨 일이 있었죠. 그죠?"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아니예요,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어요." "왜? 내가 이렇게 취해 왔다구?" "그것두 그렇구요. 자기 알고 난 이후에 이렇게 취한 걸 본 건 처음이걸랑요. 또 여자는 같이 살고 있는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남자가 말을 안해두 그걸 알 수가 있어요. 그게 무슨 일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말이에요." [얘길 할까?] "정말 오늘 이상하시네요. 그 전엔 안 그러시더니......" "좋아......" 강사범은 되는 대로 얘기를 해버렸다. 될수록 감정을 억제하리라던 생각은 일단 얘기를 시작하자 저만큼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떡하죠?" 상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뭐 당장이야 굶어죽겠어?" 그렇다.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당장 먹고 사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튼튼한 두 다리가 있는 이상, 상놈에게는 다리가 맏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면 다리가 맏아들이라서 밥벌이를 해 준다는 얘기였다. 빌딩 꼭대기로 붉은 벽돌을 져나르는 일이라든지 이삿짐을 나르는 일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일은 얼마든지 널려 있는 법이었다. "직장이 떨어졌다구 걱정할 꺼 하나두 없어. 이 세상에 내가 해보지 않은 일이란 하나도 없어. 기차 안에 돌아다니면서 얼음채운 깡맥주를 팔러 다닌다고 하더라도 월급사범보다 못할 건 없어......" "아니예요, 제 얘기는 그게 아니예요. 아빠 말이에요. 그냥 이런 식으로 버텨보려고 했었는데...... 그래서 애기가 얼른 생겼으면 했걸랑요......" 상미가 말 끝을 흐렸다. "어떡하면 좋지?" "아무래도 제가 아빠를 한 번 만나러 가봐야겠어요." "안돼!" 강민우는 한마디로 단호하게 말했다. "제발 집으로 가지 말아. 상미가 거기 나타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는 내 곁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꺼야. 그러니까 상미, 집에 가보겠다는 소릴랑은 하지 말아......" 상미 아빠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순간 강사범의 눈앞에 바람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철저한 운명의 벽. 손오공이 도술을 부리고 마술을 부려서 세상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기둥에다가 사인을 해놓고 돌아와서 의기양양해 했더니 그게 다름아닌 부처님의 손가락이었다나. 상미 아빠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그러니까 강사범에 있어서는 불도저 앞에서 삽질하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식모 앞에서 행주짜기라는 생각만 자꾸 들었던 것이다. "그럼 자기가 한 번 울아빠 만나볼래요?" "내가?" "아버지가 자꾸 집요하게 나오시는데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글쎄......" "아빠는 일단 한번 마음먹은 일이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분이에요. 내일이라도 이 집을 털컹 사가지구 우리를 쫓아낼지 모를 일이에요." "그럼 다른 동네로 이사가지 뭐......" "당분간은 그렇게 피해 다닐 수가 있겠죠. 그렇지만 결국은 우릴 찾아낼 거예요. 틀림없어요, 그리고는 처음보다도 더 강한 방법을 찾아내실 꺼예요." 마치 그것은 바다일까? 끝이 없는 검은 바다일까? 그리하여 일단 저만큼으로 물러났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단지 바다의 한 끝자락인 한 줄기 파도이듯이 일정하게 다가드는 끝없는 바다일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상미 그녀를 바다 저편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악마의 요술에 걸려 백년 동안은 잠자게 될 상미. 다시는 만나 볼 수도 없는 그곳으로 상미를 보내고 손바닥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찔레꽃으로 마술의 성에서 잠자고 있는 그녀를 끌어낼 운명의 실을 어떻게 나 혼자서 짜낼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좋아, 내일이라도 당장!" "정말?" "정말이구 말구. 찾아가서 말하겠어, 우리를 가만 놔두어 달라구...... 그 벽이 얼마나 두꺼운 벽인지는 몰라도 내 이 튼튼한 두 주먹으로 부셔 버리겠어 걱정마!" "자기 멋쟁이......" 상미가 토끼처럼 민우의 품속으로 달려 들어왔다. 민우는 그러한 그녀를 이 세상 전부를 껴안은 기분으로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술 냄새......" 민우가 얼굴을 가슴 가까이에 대자 도리질을 하면서 그녀가 말했다. "내 사랑, 내 여자, 내 운명." 강민우는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깊이 묻으며 중얼거렸다. 그곳은 아주 뜨거운 사막이었다. 그러나 시원한 물을 가득 담고 있는 호수의 신기루가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었다. 뜨거운 사막은 강민우의 건강한 손바닥 사이에서 화들짝화들짝 놀라면서 붉은 샐비어 꽃을 손 닿는 곳마다 한 송이씩 피워 올리고 있었다. 아아. 머리 속에서 떠돌던 수많은 말들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짧은 탄성만이 사고(思考)의 벌레처럼 방안에 떠돌고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에서 강민우는 꿈을 꾸었다. 모래 속으로 자신의 발가락과 무릎이 자꾸 빠져들고 있는 꿈을 꾸었다. 뜨거운 엿처럼 햇살이 그의 정수리에서 맹렬한 기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검은 망토를 입고 저만큼에서 두 팔을 벌린 채 킬킬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손. 그 뒤에서 커단 손이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부채. 손. 아. "아니 무슨 꿈을 꾸길래 이러세요?" 상미였다. 그녀는 언제나 아침이었다. 싱그러운 아침의 바람이었다. "응, 나 물 좀 줘!" 강민우는 누운 채로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밟을 때마다 먼지가 풀썩이는 사막에 스며드는 몇 가닥의 빗물. 그래. 사막을 꿈꾸고 있었어. 왜 하필이면 그런 사막에서 헤매는 꿈을 꾸었을까? "어제 웬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요?" "응, 좀 마셨지." "아주 용감하시던데요?" "내가?" "그럼요, 뭐든지 다 부셔 버리겠다구 큰 소리를 꽝꽝 치시던걸요?" "그랬었나?" "어머......" "왜?" "아니, 그럼 어저께 저한테 얘기했던 거 다 잊어버리셨어요?" "아니......" "그럼 말해 보세요." 가만 있자. 내가 많이 취했었나 보지, 내가 무슨 얘기를 했었더라. 가끔 생각나지 않는 대목들이 있었다. 끊어진 필름처럼 그러나 클라이맥스는 선연하게 생각났다. "어제, 오늘 우리 아빠 차아가서 따진다구 한 말 생가가 안 나세요?" 강사범이 여물먹는 소처럼 눈을 껌뻑거리고 있자 상미가 재빨리 그렇게 말했다. "정말?" "어머 이이 좀 봐. 어제 저녁에는 큰 소리 쾅쾅 치시면서 주먹까지 내둘러서 난 가난한 살림 다 부서지는 줄 알고 겁을 먹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까 오리발이에요?" "오리발은 무슨 오리발, 간다면 가는 거지 뭐......" "정말 가실 꺼죠?" "글쎄 간다니까." "가서 뭐라고 할 꺼예요?" "생각은 나중에 하지. 뭐 다른 사람들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한다고 하지만 난 행동하면서 생각하는 스타일이니까 말이야." 강사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침 일곱 시였다. 강사범은 척척 웃통을 벗어붙이고 골목으로 나왔다. 그리고 우선 배꼽 밑에까지 차가운 공기가 돌아들도록 심호흡을 했다. 그런 다음 온몸에서 더운 김이 솟아 오를 때까지 형(型)을 되풀이 했다. 차고 뛰고, 막고, 찌르고, 넘기고...... "아침 잡수세요." 밝은 얼굴을 하고 상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나 아침 공기처럼 상큼한 여자, 작은 해바리기처럼 밝고 고운 그녀. "실업자도 아침 먹나?" "실업가라구 해요." "허허, 제목좋고!" 부지런히 아침을 먹고 강사범은 옷을 입었다. "난 넥타이를 매면 어쩐지 목이 근질거리더라......" "그래두 아빤 단정한 걸 좋아하세요." "아빠가 나에 대해서 알만한 건 다 조사 해서 알고 계실 테지......" "그럼요, 빈틈 없으신 분이니까. 처음엔 그렇게 반대도 안했었어요." "응?" "왜 있잖아요, 그때 우이동에 가서 깡패들 하구 쌈붙어가지구 변호사 나타나서......" "그래......" "그 날 자기 호텔라운지에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연기처럼 사라지던 그 날 저는 아빠 사무실에 가서 자기 얘기하구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 난 그때만 해두 자기가 법과대학 다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아빠한테 그런 식으루 얘길 했었어요. 가난하지만 공부두 잘하구 운동두 잘하구 아마 잘 밀어주면 고등고시 패스할 꺼라구 말이에요. 아빠는 그전서부터 판사나 검사한테 저를 시집 보내고 싶어하셨거든요. 집안에 재산이 많으니까 천상 그런 거 관리하려면 법을 공부한 사람이라야 좋다는 지론을 가지고 계셨었죠." "사위가 아니라 재산 관리인을 구하고 계셨군......" "그렇게 비꼬지 마세요. 어른들은 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어라? 상미, 이거 누구 편이야? 분명히 얘기하라구. 선수 사기 죽이지 말구......"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강사범은 진짜로 사기가 죽어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 그럼 선수 다녀오겠습니다. 공주님!" "자요, 손수건." "손수건?" "옛날에 기사들이 싸움에 출전할 때는 공주가 가장 마음에 드는 기사한테 머리에 쓰고 있던 망사수건을 벗어주곤 했잖아요." 상미가 흰 손수건을 어떻게 쪼물락거리더니 세 곳이 삐죽 나오게 삼각형으로 만들어서 강사범의 왼꼭 포켓에 꽃아주었다. "꼭 카바레에 춤추러 가는 기분인데." "바레요?" "그래......" "나 몰래 자기 카바레에도 다니는구나!" "무슨 소리......" "그럼 갔다 와요." 강사범은 상미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곤 골목길을 나섰다. 8. 패널틱 킥을 맞이하는 골키퍼 그야말로 화창한 봄날이었다. 아이들이란 아이들은 모두 골목에 쏟아져 나와 깨방정을 떨어대고 있었다. 강사범은 아주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리라고 다짐했다. 흐르는 물처럼, 흐르는 물처럼 상미 아빠를 대해서 한판 승부를 겨루리라. 명동. 아침. 그곳까지 강사범은 정말 흐르는 물과 같은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상미네의 그 까마득한 빌딩 정문에 도착하자 괜히 가슴부터 후들거렸다. 십자형으로 물레방아처럼 자동으로 돌아가는 현관문 앞에 이르렀을 때 강사범은 어쩔 수 없는 현기증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어딜 찾으시죠?" 순경 비슷한 제복을 입은 수위가 그렇게 물었다. 강사범은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떤 사무실을 찾으시냐구요......" 강사범은 반짝반짝 잘 닦여 있는 유리문들을 바라보면서 우물거리고 있자 수위가 다시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잠깐만요." 강사범은 짐짓 그렇게 말하면서 수위들이 앉아 있는 긴 의자 뒤에 붙어 있는 그 빌딩의 내용을 읽는 체했다. 무슨 무슨 법률사무소, 주식회사, 인테리어 디자인실, 지방신문사의 서울분국...... 그런 사무실들이 오층까지 있었고, 그 위는 모조리 호텔이었다. 사무실 이름들이 어떻게나 질서 정연하게 갓 빠져나온 두부들처럼 정렬해 있는지 그것은 마치 줄 쳐진 장기판 안에 흑, 백으로 두 알씩 들어 있는 바둑처럼 보이고 있었다. "여기 회장님 사무실이 빠져 있는데요......" 강사범은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면서 일부러 힘있게 손가락으로 그 현판들이 달려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니나다를까 뭐 이런 개뼉다구가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 수위들이 강사범을 쳐다보았다. "회장님 사무실은 몇층 몇호실입니까?" "아니 그럼 회장님을 만나러 오셨단 말씀인가요?" 아무래도 이게 심상치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지 수위들 중에 모자에 금테를 두른 사람 하나가 그제서야 일어서면서 되물어왔다. 초라한 제복이었지만 그가 쓰고 있는 모자차양에 수놓아진 금테는 분명히 경찰서장이나 장군들의 모자차양에 둘러쳐진 그런 권위와 복종, 명예와 위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수위가 강사범의 위 아래를 새삼스럽게 훑어 보았다. 한알의 객적은 먼지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깎은 듯이 다듬어진 그 호텔의 현관, 자동으로 둥그렇게 돌아가는 십자형 문으로는 인형처럼 차려 입은 여자들이 마술처럼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었다. 붉고 두꺼운 카피트가 깔려 있어서 라면 한 개를 사먹기 위해 백동전 하나를 얻으려는 가난한 거지는 감히 그 더러운 신발을 들여놓을 수조차 없는 곳...... "네, 좀 만나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사전에 약속이 돼 있으신가요?" "사전에 약속이 돼 있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다는 뜻인가요?" 강사범이 그렇게 강하게 나가자 수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물론입니다." "그럼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백곰대학 근처에서 태권도 월급사범을 하는 강민우란 청년이 회장님 따님의 일 때문에 의논을 드리러 왔다구 말입니다. 아마 그렇게만 전하면 사전 약속 따위는 따지지 않으실 겁니다." 강사범의 말에 수위는 움칠 놀라는 시늉을 하더니 구내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는 방금 강사범이 한 말을 전화기에 대고 그대로 되풀이했다. 전화기 저쪽에서 무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올라가 보십시오." 수위가 금방 풀이 죽어서 말했다. "몇층으로 올라가는 겁니까?" "십칠층 오호실에 비서실이 있습니다. 우선 그리로 올라 오시랍니다." 마침 엘리베이터 한 대가 문을 열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현란한 속도였다. 잠시 눈을 떴다가 감고, 조금 감았다가 뜨면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숫자판이 한꺼번에 다섯 개씩 솟구치곤 했다. 1에서 15호 그렇게 곤두박질하는 숫자처럼 상미의 아빠도 그렇게 돈을 벌고 있겠지...... 언젠가 상미가 그런 말을 한적이 있었다. 누구든지 돈이 1억 원만 있으면 언제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 살 수가 있노라고...... 삼천만 원짜리 집을 사고...... 삼천만 원 정도는 투자신탁에 넣어두면 매달 대학교수의 봉급이 이자로 나오고...... 천만 원으로는 사채이자를 믿을 만한 데다가 놓으면 자가용을 굴릴 수 있는 경비가 나오고...... 나머지 돈으로 허름한 땅을 샀다가 팔았다 하면 결코 그놈의 돈이 줄어들지가 않을거라는 말을 했었다. 그때 강사범은 그렇게 말했다. 단돈 오백만 원만 있으면 혼자서 경영하는 태권도 도장을 차릴 수가 있고, 그렇게만 되면 최소한도 처자식 밥을 굶기지는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이다. 17층에서 강사범은 홀로 복도에 섰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야. 상미, 내 사랑을 위해서 이 두꺼운 마의 벽을 하나씩 하나씩 내 건강한 육신으로 쳐부수고 들어가야 해. 똑똑. 열려라 참깨. 들어 오세요. 강사범은 심호흡을 한 다음 문을 열었다. "조금 기다리세요." 감색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아가씨가 타이프라이터를 두들기다 말고 말했다. 비록 제복을 입었지만 여자임을 숨길 수 없는 그녀의 봉긋한 왼쪽 가슴에 초록색으로 만든 플라스틱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촌놈처럼 보이기가 싫어서 강사범은 사방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똑바로 앞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손바닥 안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왔다. 겨드랑이에도 땀이 미끌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그곳에 앉아 있었지만 어쩐지 산소라고는 한 움큼도 들어있지 않은 유리상자에 갇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 왔다. 단정하게 머리를 뒤로 묶고 있는 여비서의 흰 이마가 형광등 불빛 아래 보이는 마네킹처럼 차가와 보였다. "어, 드디어 나타나셨군......" 그 비서실 안쪽에 붙어 있는 문이 열리면서 그렇게 나타난 사람은 상미네 변호사였다. "안녕하십니까......" 강사범은 앉은 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래, 그동안 별고 없었소?" "저한테 별일이 있다는 걸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강사범은 먼저 그렇게 화살을 날렸다. "아,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청년?" "태권도장은 그곳 한군데가 아닙니다. 서울 시내에 얼마든지 있어요. 제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취직을 할 수가 있다 그런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변호사는 껄껄 웃기만 했다. 가소로와 죽겠다는 듯이...... 안경알 속에서 그의 눈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정말 어떻게든지 내가 정식으로 상미의 남편이 된다면...... 아니 이 엄청난 높이를 가진 건물 주인의 사위가 된다면...... 난 제일 먼저 당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소. 그런 말을 당당하게 이 자 앞에서 내던질 수 있는 처지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냐, 정말 내가 그런 처지에 있다면 이 자가 내 앞에서 이런 식으로 거드름을 피울수는 없겠지...... "그래, 마음이 좀 변하셨소?"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은 상미 아버님을 잠깐 뵈려 왔습니다. 제발 우리들을 가만 내버려둬 달라구요. 내가 원하는 건 상미 그녀 하나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무리 방해를 하셔도 그 점은 변치 않을 겁니다." 단번에 상미 아빠를 만날 수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올 때부터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강사범은 우선 딱딱 부러지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댔다. 최변호사는 담배를 피워 물면서 말했다. "저는 회장님의 뜻에 따라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물론 그러실 테죠. 돈이 얼마나 많은지는 몰라도 제가 취직을 하는 도장마다 다 사들일 수는 없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실 얘기를 그렇게 꺼내면서도 강사범은 자신의 말에 조금의 자신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돈의 부피가 얼마나 되는지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으므로...... 다만 한두 번의 그런 수법에 쉽사리 지쳐서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자꾸 되풀이된다면 회장님이 따님을 영영 다시는 보질 못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당신들이 찾아낼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릴 테니까요. 그리고 이런식으로 숨박꼭질을 해가지구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강사범의 말에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무엇인가를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전 단지 이 문제에 있어서는 고문 변호사라기 보다는 제 삼자의 입장이니까요. 회장님을 한 번 만나 보시죠."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공갈이란 가끔 필요한 것이로구나...... 정말 당신들이 정 그렇게 나온다면 상미와 나는 귀신도 모르게 같이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라는 말까지도 하려고 했었는데 말이다. "갑시다." 변호사가 일어섰다. 강사범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회장실은 그 건물의 제일 꼭대기에 있었다. 생각보다는 평범한 방이었다. 강사범이 턱 들어서자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 하나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회전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강사범을 바라보았다. "첨 뵙겠습니다, 제가 강민우입니다." 그래...... 비록 성성한 백발이지만 상미와 아주 많이 닮은 얼굴이군...... 혈색이 나보다도 더 붉고, 눈빛이 예리해...... "딸 아이는 잘 있겠지?" "네......" 강사범은 그렇게 대답했다. "나쁜 놈 같으니라구......" 누구인지도 모르게 상미 아버지는 그렇게 내뱉었다. "나쁜 놈 같으니라구!" 회장은, 아니 상미 아버지는 그렇게 또 한번 되풀이했다. 너한테 할 얘기라고는 꼭 그것밖에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영감님은 지금 당신의 딸과 처음으로 애틋한 사랑을 하며 살을 섞으며 살고 있는 젊은 청년과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영감님이 가장 사랑하셔야 할 손자를 낳아줄지도 모르는 당신의 사위, 그렇습니다, 실질적으로 사위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거랍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당신의 첫마디가 나쁜 놈이라니요, 그런 너무하지 않습니까,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 그런 말입니다. "왜, 내 말이 틀렸단 말인가?" 강사범이 눈으로 그렇게 항변하자 영감은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다시 그렇게 칼을 던져왔다. 좋습니다. 칼을 던지시지요. 당신이 그동안에 사랑하는 딸을 강도질당했다는 기분에서 갈고 있던 그 칼들을 모조리 뽑아서 저에게 던지십시오, 달갑게 받겠습니다. "나쁜 놈이지 않고. 순진한 내 딸을 꼬여가지구 덜컹 살림을 차려? 그래서 내가 지칠 때가지 기다리는 수작이겠지...... 암 그렇구 말구...... 난 너 같은 비렁뱅이 청년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어, 한 입에 통째로 삼켜보겠다, 그런 뱃심이지? 흥, 어림도 없다구, 어림도 없어......" "아버님!" 강사범은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뭐, 아버님? 이봐, 변호사 들었지? 이놈이 하는 수작을 들었지? 날 보고 아버님이래--제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는 고아주제에 날 보구 아버님이래 허허......" "저두 할 말이 있습니다." "할 말? 그래 어디 해봐. 좋아, 들어줄 테니까 어디 마음대로 지껄여 보라구." "전 젊습니다." "그래서 젊음이 밥 먹여 주나?" "젊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전 누구보다도 건강합니다." "그래 계속해 봐. 내가 나중에 재벌이 될지 대통령이 될지 어떻게 아느냐구 말해 보라구, 링컨 대통령도 국민학교 밖에 안 나왔구, 에디슨도 학교 다닐 때 맨날 꼴찌만 했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지? 그러나 자넨 틀렸어. 쓰레기통에서는 꽃이 안피는 법이야. 호박꽃도 안펴. 자네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아무것도 될 수가 없어. 모든 걸 비정상적으로만 보는 자네 같은 사고방식, 왜 처음부터 한계단 한계단 올라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거야? 부잣집 딸 꼬여 가지구 덜컹 살림이나 차려서 애나 낳아 놓으면 제까짓 게 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했지? 하나 천만에 말씀이야. 그런 식으로 세상을 요행으로 살려는 놈에게는 굶어 죽더라도 십원 한장 적선하지 않겠어. 차라리 거지를 돕는 게 낫지......" 영감은 폭포처럼 분노를 퍼부어 댔다. 마치 큰 덩어리의 부동산을 사려는데 그 가운데 땅 몇 평을 가지고 엉뚱한 흥정을 걸어오는 사람을 대하듯이 몰아세우고 있었다. "전 돈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닙니다." "그래? 좋아, 그럼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거야?" "제발......" 목구멍으로 뜨거운 울음이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강사범은 말을 이었다. "제발, 저와 상미를 조용히 살게 내버려둬 주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저희들이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뭔가 보여준다구? 자네 코미디 하려구 여기까지 와서 바쁜 사람 화통터지게 하고 있나? 그래 뭘 보여주겠다는 거야?"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걸요. 저 같은 사위를 두셨다는 걸 후회하지 않게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영감은 묵직한 파이프를 꺼내 탕탕 유리재떨이에 털어댔다. 옆에 서 있던 변호사가 얼른 라이터를 켜서 대령하고 있다. 뻑뻑, 영감이 파이프를 빨아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영감이 아까보다는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 사위는...... 내가 평생에 이룩해 놓은 이 사업을 충분히 이끌어갈 만한 실력을 갖춘 자라야 해. 검사, 판사, 의사들이 줄을 서 있다구. 젊고 유명한 정치가들두 있구 말이야. 자네도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을 해보라고. 어디 한번 솔직하게 대답을 해 봐. 자네 같으면 자네 같은 고아에게 딸과 재산을 줄 수가 있겠나?" "돈 얘기는 빼십시오." "이사람아, 그건 단순히 말장난일 뿐이야. 그래 어때 자네 같으면?" "전 무엇보다도 딸의 행복을 생각하겠습니다." "행복?" "네, 그렇습니다." "그래? 자신이 있다 그건가?" "네......" "웃기는군. 상미는 지금이라도 충분히 자격을 갖춘 남자를 백 명쯤 세워놓고 고를 수가 있어......" "백화점의 스카프를 고르는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여봐!" 영감이 아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자네는 자네의 출신과 자네의 현실에 맞는 여자를 고르게. 그것이 자네가 말하는 행복의 지름길이야. 주제파악을 하란 말일세. 주제파악을......" 그리고 그는 돌아앉았다. 바위처럼 무겁게 돌아앉으면서 마지막으로 말했다. "돌아가게, 자네에겐 응분의 보상을 해줄 테니까." "사양하겠습니다." "가봐!" 냉엄하게 돌아앉은 영감의 어깨너머로 술술 파이프 담배 연기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신비에 싸인 피레네 산맥처럼 그의 성성한 흰 머리칼 앞으로 가진 서울의 빌딩 숲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것이 강사범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나가지" 변호사가 강사범의 팔을 잡았다. 복도로 나오자 그제서야 진한 설움이 복받쳐 왔다. --나쁜 놈 같으니라구-- --즈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주제에-- --젊음이 밥 먹여 주나?-- --판사, 검사, 의사가 줄서 있다구-- 아, 이건 산맥(山脈)이다, 히말라야 봉우리다, 맨해턴의 빌딩숲이다, 사막이다, 검은 버뮤다의 바다다, 스핑크스다, 그리고 한 마리의 긴 뱀이다. 내가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고 넘을 수도 없는 험준한 산맥. 강사범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쪽처럼 매끈한 차들이 길게 꼬리지어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꽃처럼, 버섯처럼 우산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유리창에 빗물이 묻어 미끄러지고 있었다. 겨울 얼음판처럼 매끈한 유리창에 떨어질 때는 그 두꺼운 유리창을 꿰뚫으려는 의도로 다가들었던 빗방울들. 나도 저렇게 부서지고 미끄러질 수 밖에는 없단 말인가? "자네 나하구 얘기 좀 하지......"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면서 변호사가 말했다. 항복한 장수처럼 말없이 강사범은 변호사를 따라갔다. 아까의 그 비서실이었다. "우리 차를 한잔 하면서 차분하게 얘길 해봄세......" 변호사가 안경을 좀 치켜 올리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이상하다. 이 변호사가 그전에도 안경을 쓰고 있었던가. 아니면 사무실에서만 저런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일까. 잘 생각이 나질 않는군. 나는 지금 무슨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옛날. 고아원의 그 추운 복도. 가끔씩 행사가 있었다. 눈이 노랗고, 코가 크고, 손등과 팔에 털이 북실북실한 미국 사람들이 고아 입양을 위해서 거기 나타나곤 했었다. 그들은 고아원 아이들이 그날따라 목욕을 깨끗이 하고, 옷을 예쁘게 입고 천사 닮은 얼굴을 하고 죽 늘어서 있으면 마치 인형을 고르듯이 아이들의 손과 발, 그리고 치아를 살펴보곤 했다. 어떤 때는 그 털복숭이 양키들의 손에 색깔이 천연색인 아이들이 따라와 예쁜 강아지를 고르고 사달라고 떼를 쓰듯이 고아들을 데려가곤 했다. 그런 행사가 있고 난 날 밤이면, 그리하여, 아, 나는 또 뽑히지 못했기 때문에 따뜻한 이불과, 따뜻한 방이 있는 안온한 삶의 터전에서 또 한 발 뒤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을 어린나이에도 은연중하면서 결국 몇 방울의 눈물을 베개에 얼룩지우고 지쳐 잠들었을 때, 꾸는 그 악몽. 꿈을 꾸면서도 그 꿈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너무나 선연하여 현실인 것 같기도 하고, 이윽고 꿈에서 깨어나면 또 그 꿈이 너무도 깨끗하게 눈 앞에 재생되어 끔찍하기조차 했던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악몽들. "차를 들지......" 언뜻 강사범은 자신을 살펴보았다. 내가 아직 상미 아빠를 만나보기도 전에 그런 악몽을 꾼 것은 아닌가. "사람은 말이야, 어느 경우에든지 현명해야 돼. 물론 젊다는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 무모한 일에 매달릴 수도 있겠지,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처럼 성공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겠지,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는 한 자네가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는 일이야. 왜 옛말에도 있지 않나!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야. 아, 물론 상미양하고 같이 지내고 있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에 불과한 얘기예요. 내 말 알아 듣겠나? 자네가 지금 상미양하구 같이 지내고 있기 때문에 그걸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일세, 그건 현실이 아니라 무지개야." 코피잔에서 엷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의 코피는 다른 날보다도 세 배는 맛있다고 한게 상미의 말이었지. 한강 하구의 그 갈대숲 사이에서 코피를 한잔 마시면 좋겠다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말하던 상미. 우리가 나누었던 그 숱한 언어들은 지금쯤 어느 허공에 머물러 있을까. "어때 강군. 자네 이 일을 한번 현실적으로 해결해 볼 생각 없나?" "현실적이라니요." "아까 회장님 말씀 들었지?" "네......" "회장님도 자네가 얼마만큼 마음이 아플 것이라는 건 잘 알고 계셔, 회장님도 사람이니깐 말일세......" "그래서요?" "그러니까 그 아픔을 현실적으로 보상을 해줄 수 있다 그런 말일세......" "계속해 보세요......" "이를테면 자네 앞으로 태권도장을 하나 차려 준다든가." "물론......" 강사범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을 계속했다. "상미를 돌려 보내는 조건으루 말씀인가요?" "물론이지......" "태권도장을 말이죠?" "어때?" 강사범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코피잔을 들었다. 강사범은 입술을 꾹꾹 깨물고 있다가 자신있게 능글거리고 있는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제가 상미를 보내면요?" "내가 회장님께 말씀을 드려서 자네에게 근사한 태권도도장을 하나 차려주지...... 물론 등기도 자네 앞으로 해줄거구 말이야......" "개새끼!" 강사범은 들고 있던 코피잔을 최변호사의 얼굴에다가 정통으로 던져버렸다. 어이쿠 하면서 변호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한 갈색의 코피물이 마치 줄줄 쏟아지는 피처럼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이놈이!" 생각보다 코피가 뜨겁지는 않았던지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리고 변호사가 그렇게 소리쳤다. 그의 안경알 한쪽에 역시 코피물이 묻어 있어서, 전신을 단단한 법이라는 계산으로 감싸고 있어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던 그의 모습을 우습게 흩뜨려놓고 있었다. 강사범은 여자처럼 희고 섬세한 그의 팔목을 꽉 움켜쥐었다. 끙, 하고 조금 힘을 주기만 하면 마른 삭정이 가시처럼 부러져 나갈 듯한 여린 손목 하나를 살짝 꺾어 놓는다고 해서, 그의 번들거리는 안경을 구두 뒤꿈치로 아삭아삭 으깨어 놓는다고 해서 자신의 앞에 가로놓여 있는 그 커다란 아집의 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만 있다면...... 단단하게 다져진 이마로 열댓 개의 잘 구워진 기왓장을 놓고서 으라차차, 기합을 주고 와장창 깨칠 수 있는 내 이 무쇠 같은 손으로 부술 수 있는 형체 있는 것들이라면 내 손에 허연 뼈가 드러나도록 힘껏 쳐보고 싶었다. 강사범은 쥐고 있던 변호사의 손을 놓고서 벌떡 일어섰다. 변호사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시어져 있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다시 내 얼굴을 보게 됐을 때는 조심하게." 그러나 강사범은 변호사의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서 휑하니 그곳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는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한꺼번에 다섯 층의 공간을 우물에 떨어지는 돌처럼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와 조그만 시골 읍 역전에서 내리 서너 끼를 굶다가 차가운 맹물로 주린 배를 가득 채우고 쨍쨍하게 푸른하늘에 떠 있는 햇발을 똑바로 올려다볼 때처럼 눈 앞이 어질어질했다. 아침 숲길에 밤새 내린 이슬을 보석처럼 매달고 있는 거미줄 같은 환영이 눈 앞에서 어른대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환각만이 아니었다. 그 높은 빌딩의 꼭대기에서 단숨에 아랫층으로 내려와 빙글빙글 자동으로 돌아가는 십자형의 출입문 앞에 섰을 때에 그는 다시 그 환영의 실체를 볼 수가 있었다. 육각형으로 정교하게 자른 유리 구슬들이 잔뜩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가 그렇게 반짝반짝 새벽이슬을 매달고 있는 산속의 거미줄처럼 그의 눈 앞에서 빛나고 있었다. 십자형으로 돌아가고 있는 유리문을 빠져나와서 강사범은 다시 한 번 자 이제 마지막이야, 하는 심정으로 그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속이 휭하니 빙글거리고 있었다. 밑에서 쳐다보는 그 빌딩의 제일 꼭대기는 마치 피라밋의 모형처럼 뾰죽하게 보이고 있었다. 강사범이 잠시 그렇게 멍하니 그 빌딩의 꼭대기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 빌딩의 뾰죽한 꼭대기로부터 무엇인가 흰 날파리 같은 물체들이 날아 내려오기 시작했다. 무엇일까? 잠시 그렇게 날파리들처럼 날아 내려오고 있는 흰 물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까, 아, 그게 어느 사이엔가 후둑후둑하는 빗방울로 변해서 날카롭게 차가운 느낌을 동반한 채 그의 얼굴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새 그 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회색빛의 도시 위에 풀썩풀썩 비먼지를 일으키면서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리를 걷고 있던 사람들은 누렇게 익은 논에 앉아서 쌀알을 까먹고 있던 참새들이 후여, 하는 아이들의 소리에 놀라서 허공으로 날아 오르듯이 허겁지겁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 강사범은 방향도 정해 놓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떨어지고 있는 빗줄기가 천천히 머리 속을 흘러 내려와 목덜미를 지나서 와이셔츠의 깃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차고 시원한 느낌. 힘껏 대련을 하고 더운 김이 풀풀 피어오르는 발가벗고 시원하고 힘있게 쏟아지는 샤워 밑에 들어서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벌써 며칠짼가. 운동을 하지 않은 그의 근육은 졸아들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 운동을 하다가 어찌어찌하여 쉬게 돼서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은 사방이 가려웠다. 몸 전체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벼룩들이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비 때문에 서서히 온몸이 젖어오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다시 그 밑으로 꾸적꾸적 빗물이 젖어들고 있었다. 벌써 바짓가랑이는 물에 담근 청바지처럼 뻣뻣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넋을 놓고 걸었을까...... 그는 어느 사이에 제일한강교 근처에 와 있었다. 비가 봄비답지 않게, 꼭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듯이 소리내어 퍼붓고 있었다. 강. 그래...... 녹색의 강...... 도저히 맑은 시냇물처럼 깨끗해질 수 없는 썩은 강. 그 강 밑바닥에 온갖 인간의 더러움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흐르고 있는 그 강. 강사범은 막연하게 흐르고 있는 그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강 위에서 또는 그 초록색으로 썩은 강 한가운데에서...... 또는 그 강변의 끝에서 상미와 주고 받았던 그 많은 아름다운 말들...... 그 말들도 결국은 홍수처럼 저 깊은 바다 한가운데로 떠내려가서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마는 것일까? 저만큼에서 비닐우산 하나가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었다. 이상하다. 처음 그 비닐우산을 봤을 때는 그 우산이 주인을 잃고 다리 위에서 바람에 굴러 다니고 있는 듯이 보이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니 정말 그 우산이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있었다. 우산 하나만이 강을 건너고 있다니...... 온몸이 비에 젖어서 좀 춥다는 생각을 하면서 강사범은 그 우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우산은 주인없이 바람에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그 우산을 쥐고 천천히 다리를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조그만 아이일까? 조그만 아이가 엄마 몰래 우산을 들고 나와서 비 오는 강을 구경하러 나오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조그만 국민학교 아이라고 하더라도 우산을 들고 걸어오고 있다면 작고 가는 다리나마 보여야 할 텐데. 강사범은 가만히 서서 두꺼비처럼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는 그 우산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그 우산이 댓걸음 앞에까지 오자 흠칫 놀랐다. 그 우산의 주인은 다름이 아니라 두 무릎 밑이 몽땅 잘려나간 앉은뱅이였기 때문이었다. 그 앉은뱅이는 잘린 두 무릎에다가 널찍한 고무타이어 껍질을 싸맨 채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었다. 그 앉은뱅이의 두 손에는 참나무로 만든 두툼한 나막신이 싸매져 있었다. 그런 그가 한 손에 우산을 들고서 다리를 건너고 있자니까 자연히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둥그런 우산의 겉모습만 강사범의 눈에 들어와서 마치 우산 하나가 슬몃슬몃 바람에 날아다니고 있는 듯이 보였던 것이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우산의 주인이 옆에 왔을 때에 강사범이 큰 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다리를 건널꺼구먼요." 의외로 깨끗하게 생긴 얼굴의 주인공이 그 우산 밑에서 말하고 있었다. "아니 왜 버스를 타지 않구요?" 강사범의 물음에 그가 씩 웃어보였다. 슬픔이나 원한은 뒤에 꽁꽁 숨겨놓고서 근육으로만 웃는 그런 웃음이었다. 이 웃음은 전에 어디서 많이 본 적이 있는데...... 그래 이 웃음은 나 같은 비천한 사람들이 웃는 그런 웃음이야. 환한 햇빛 아래서는 결코 드러내 놓을 수 없는 원한과 슬픔...... 그리고 비애일랑은 마음속의 가장 비밀스러운 창고 속에다가 감추어 놓고서 근육으로만 웃는 그런 웃음...... "우리 같은 놈을 누가 버스를 태워 줘야지요......" 그 앉은뱅이는 별로 강사범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다시 슬몃슬몃 두꺼비처럼 움직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저 목소리...... 저 웃음...... "여보세요!" 강사범은 문득 무엇인가 지피는 게 있어서 그가 쓰고 있는 우산을 낚아챘다. 맞아 이 친구는...... "너 나 몰라 보겠니?" 강사범은 앉은뱅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앉은배이는 잠시 꿈꾸는 듯한 멍한 시선으로 강사범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너 민우......" "그래, 나 강민우야...... 너 따또...... 아니 진복이가 아니니?" "따또......" 그 앉은뱅이가 강사범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 김따또 김진목이 맞지?" 강사범이 다시 그렇게 물었다. "그래, 너 강민우구나...... 강통뼈...... 네 별명이 통뼈였었지......" "따또야 이게 웬일이니?" 강사범은 그를 잡아 일으키려 했다. 그의 어깨죽지 밑에 손을 넣어서 그를 일으켜 세워보려 했다. "소용없어, 난 일어설 수가 없는 걸......" 조용조용하게 앉은뱅이 따또가 말했다. "어떡하다가 이렇게 됐니?" "왜 있잖아, 너두 한때는 기차간에서 깡통맥주 팔고 다녔잖니...... 나도 그걸로 먹고 살았었어...... 그러다가 어느날 차장한테 들켜서 뛰어 내렸는데...... 잘못 뛰어 내렸지 뭐...... 글쎄 기차 밖으로 뛰어 내린다는 게 차바퀴 밑으로 굴러 떨어졌으니...... 인생 깨지지 않고 이렇게라도 산 게 다행이지......" 강사범은 목울대가 울컥 뜨거워졌다. 뱃속에 괴어 있던 피가 왈칵 토해져 나올 것 같았다. "따또야......" 강사범은 그 말만을 하곤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우리 쓰레기 같은 인생들이 여기서 이렇게 비참하게 만나고 말다니...... 따도. 김진복이...... 두 무릎이 기차바퀴에 잘려 나가 앉은뱅이가 돼 버린 고아원 동창생...... 하필이면 이렇게 서러운 날 너를 만나다니...... 건센 바람 앞에서 꺼질 듯 꺼질 듯 한들거리는 촛불 같은 내 마음 하나 겨우 한 손으로 가리고, 눈 앞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이 세상을 조심조심 한발 한발 걷고 있는 오늘 같은 날 너를 만나다니...... 넓은 강을 핥고 지나온 바람이 따또를 붙잡고 서럽게 울고 있는 강사범의 넓은 등판위로 휘락휘락 빗줄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그만해라 민우야...... 통뼈라는 자식이 웬 눈물이 그리 많으냐......" 그렇게 말하는 고아원 동창생 따또의 얼굴은 빗물과 눈물이 함께 번질거리고 있는 강사범의 얼굴과는 반대로 맨숭맨숭했고, 그저 눈동자만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내 몸에는 이제 한방울의 눈물도 남아 있지 않아...... 이제 다시 눈물이 나온다면...... 아마 그건 핏방울일 거야." 미안한 듯이 강사범을 쳐다보면서 따또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 어떻게 사니?" 저 혼자만의 서러움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불행할 건덕지라고는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친구 앞에서 혼자 울어 버렸다는 생각을 하면서 강사범은 따또에게 물었다. 따또가 대답 대신 어기적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한 장에 백원> 그의 등 뒤에는 직사각형의 그런 팻말이 붙어 있었다. "뭘 팔려 다니는 거냐?" "응...... 걸레를 팔러다녀. 어때 어울리지 않니? 걸레 같은 인생이 걸레를 팔러 다닌다는 것이. 난 이 푯말을 목에 걸고서 개처럼 어기적거리면서 시장바닥을 돌아다닌단다. 그러면서 목청껏 외치지. 걸레 사십시오. 걸레는 빨아도 걸레, 삶아도 역시 걸레입니다. 걸레 사십시오." "그만해라 따또." 따또의 그 목쉰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강사범은 그렇게 말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솟아 나올 것처럼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따또는 그 눈으로 강사범을 노리듯 쳐다보았다. "너두 사는 게 신통치는 않은 모양이구나." "아냐. 그렇지 않아. 우리 어디 가서 좀 앉아야 되지 않겠니?" "어디?" "응, 아무데나...... 빗발도 좀 피하구, 술도 한잔 마실 수 있구 한데루 말이야......" "민우야 나 좀 업구 가겠니?" "물론이야 물론이구 말구...... 나 업혀라......" 강사범은 덥석 따또를 업었다. 이외에로 가뿐한 느낌이었다. 무릎 밑이 몽땅 잘려져서 보통사람보다는 몸무게가 덜 나가기 때문일까? 아니면 영양실조로 그렇게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 것일까...... "넌 언제나 튼튼하구나. 옛날보다 더 튼튼한 거 같다." "생각나니?" 강민우가 등 뒤의 따또에게 말했다. "우리가 고아원에서 도망치던 날?" 따또가 조금 큰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자식, 잊어버리지 않고 있구나...... 그래 어쩌면 너와 나 둘이서 영원히 잊어 버릴 수가 없는 날일 거야......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잦은 번개가 땅 위에 나동그라지는 걸 그 날 이후에 강민우는 한번도 볼 수가 없었다. 고아원의 일본식 목조건물의 유리창을 뜯고 나와서 읍내로 향하는 숲길을 따라서 따또와 그밖의 몇명 아이들과 함께 도망을 치고 있는데 우르르쾅쾅 하늘을 찢어발기는 뇌성병력도 없이 후줄근한 빗발과 함께 마른 번개만 자꾸 땅 위에 흩뿌려졌었다. 번쩍번쩍 반짝반짝, 그 마른 번개가 땅 위에 나동그라질 때마다 빗물이 괸 웅덩이가 번질거리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번개는 마치 그들이 도망가는 숲길을...... 그 숲길이 꼬부라지고 어우러질 때마다 한 번씩 번쩍이면서 밝혀주곤 했었다. "그때도 네가 나를 좀 업어 주었었지...... 내가 길에 미끄러져서 발목을 삐는 바람에 말이야." 아마 따또도 등 뒤에서 강사범과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렇게 말해 왔다. "넌 언제나 그렇게 말썽이더니만...... 그래 집이 어디냐?" "저기 국립묘지 뒷산이야." "알고 보니까 가까운 데 살고 있었구나...... 나두 그 산 건너편 산동네에 살고 있어...... 그런데 그렇게 가까운 데서 살고 있으면서 어떻게 널 한 번도 볼 수가 없었을까?" "높은 데만 쳐다보고 다녔겠지......" 그거야 간단하지 않느냐는 듯한 어조로 따도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 난 너무 그동안 높은 곳만 바라보고 살고 있었나 봐...... 분수를 알아야 하는 건데...... 주제를 알아야 하는 건데...... 상미 아버지가 자신에게 던졌던 그 비수 같은 말들이 생각났다. 가슴에 깊이 꽂힌 채 언제나 피를 철철 흘리게끔 만들어 놓은 그 칼날들. 강사범은 한참을 말없이 따또를 업고 산비탈길을 올라갔다. 올망졸망한 산동네의 허름한 집들이 끝나자 거기 무허가로 지었다가 철거당한 집터가 나타났다. "저기야, 내가 잠자고 있는 곳이." 따또가 뒤에서 그렇게 부서져서 어수선해 보이는 빈 집터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 굴처럼 움푹 패인 지형이 한 군데 있었고 그 앞에는 뻐덕뻐덕한 루핑조각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들어가자...... 그래두 보기보다는 아늑하다구......" 강사범이 머뭇거리자 따또가 말했다. 강사범이 펄럭이는 루핑종이를 젖히고 따또를 데리고 그 안에 내려놓자 어두컴컴한 그 안의 윤곽이 드러났다. "글쎄 누군가가 산동네에다가 이런 지하실을 만들어 놓았다니까...... 철거하는 사람들도 이런 지하실이 있으리라고는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내가 이곳을 발견하기 전에는 삭월세방을 얻어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꼬마아이들이 이 안에서 장난을 하고 있는 걸 발견하구선 사탕 몇 봉지로 이 집을 내가 사 버렸지...... 보기보다는 괜찮지?" 석유등잔을 켜면서 따또가 말했다. 불이 켜지자 정말 그곳은 보기보다 아늑했다. 자잘한 살림도구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마치 굴속처럼 어두컴컴했지만 한두 사람쯤 기거하기에는 충분했다. "우리 옛날에 고아원 뒷산에다가 이만한 토굴을 파놓고서 갖은 도깨비 같은 물건들을 다 주워다 놓곤 했지......" "그 안에서 가짜 결혼식두 했구 말야...... 술 한잔 할려?" "술 마시니?" "응, 비오는 날이면 무릎 밑이 시리고 쑤셔서 술을 먹곤하지...... 그래 결혼은 했니?" 아무리 살펴봐도 그곳에는 여자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얘길 꺼내는 것일까? 토굴 속에서 가짜 결혼식을 하곤 했었다는 얘기 때문일까? "아니...... 아직......" "왜 먹구 살기 힘들어서?" 커다란 종이컵에다 소주를 따라 부으면서 따또가 물었다. "웬 술을 한꺼번에 많이 따르니?" "그냥 한잔씩 쭉하지 뭐......" "그러자......" "건배!" "우리들의 불행을 위해서!" "자식......" 강사범은 이홉들이 한 병을 다 쏟아부은 그 소주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마치 갈증난 끝에 흰 사이다 한잔을 쭉 마시듯이...... 소주를 들이켰다. "난 그렇다 치구...... 넌 무슨 청승에 비 오는 날 한강가에서 곧 빠져죽을 놈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니?" 노란 단무지를 숟가락으로 잘라 내놓으면서 따또가 물었다. 강사범은 따또의 말에 대답은 않고 잠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급히 들이킨 술기운이 뱃속을 얼얼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냥......" 후 하고 담배연기를 내뿜으면서 강사범은 한참만에 그렇게 말했다. "그래 말하기 싫음 말아라...... 그리구 죽구 싶으면 언제든지 여기루 와......" "왜? 내가 여기루 오면 해결해 줄래?" "해결은 마...... 내가 뭘 해결할 수 있니...... 정말 칵 죽어버리구 싶을 때 날 찾아와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죽고 싶은 생각이 좀 없어질 것 같아서 그러지......" "야...... 따또야 어떡하면 좋니?" 강사범은 말하기 시작했다. 늦가을의 대학축제 때에 만났던 상미의 얘기를...... 그녀의 웃음...... 그녀의 환한 눈...... 겨울 빙판처럼 맑은 그녀의 마음...... 맨손과 장미마담...... 그리고 뿌연 새벽에 있었던 한강 위에서의 줄다리기...... 어디 그뿐이랴...... 산꼭대기에 있는 그들의 비둘기장 같은 작은 방에 오밀조밀 차려져 있는 소꿉장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상미 아버지의 그 커다란 빌딩에 대해서...... 또한 그 사람이 던진 칼에 맞아 비틀거리던 자신의 마음까지 하나도 남김 없이 강민우는 따또에게 말했다. "이제 비가 그쳤나 봐." 오랜 시간 묵묵히 강사범의 슬픈 얘기를 듣고만 있던 따또가 강사범의 얘기가 끝나자 입구에 걸쳐져 있던 루핑을 긴 장대로 앉은 채로 걷어내면서 그렇게 말했다. "따또야, 난 어떡허면 좋겠니?" 강사범은 아무 말없이 멍하니 비가 개인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따또에게 그렇게 물었다. "네가 잘 알 텐데......" 지나가는 말처럼 따또가 말했다. "결국 헤어지란 말이지?" "그렇지 않음 어떡허니? 우린 피가 달라...... 알았니? 무슨 말인지. 가끔은 우리 중에서도 당당하게 저들의 세계에 뛰어 올라가 있는 친구들을 볼 수는 있어...... 그러나 그건 단지 볼 수 있다는 것뿐이야...... 만질 수도 없구...... 냄새 맡을 수도 없는 그런 거야...... 아니 넌 또 다른지도 모르지...... 넌 무엇보다도 건강하니까...... 건강하구 멀쩡하니까 말이야...... 나하구는 다를지 몰라...나에게 있어서 이 세상이란 그저 영화 같은 거야...... 난 언제나 구경군이구 말이야...그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한데...... 구경군보다 편한 게 있는 줄 아니?" "아냐. 그건 나두 같아...... 아직은 말이야......" "그럼 간단하지 않니...... 그 여자애를 집으로 보내라. 아마 그 여자애두 가난이라는 걸 영화처럼 보고 있다가 한번쯤 그 세계에 뛰어들고 싶었는지 모르지...... 거기 사랑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구 해두 말이야...... 알겠니 내 말?" "나두 그렇게는 생각하구 있었어......" "그럼 뭘 망설이니?" 그래...... 알았다.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나서 아니 그녀의 얼굴이 시시때때로 내 베갯머리로 나타나는 그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우리들이 걸어가는 건 비극의 끝이라구...... 어쩌겠니...... 어쩌겠니...... 보내야지...... 9. 이대로 돌이 되자 강사범은 상미와 깨소금 같은 살림을 하고 있는 산꼭대기의 작은 방에 가만히 서 있었다. 조그만 창가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그 안온한 느낌의 불빛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던가...... 아니 그건 그냥 부러운 것이 아니라 강민우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커다란 인생의 목표였었다. 따뜻한 방과 따뜻한 불빛과 그리고 아내, 또 잘 익은 수밀도 같은 볼을 가진 귀여운 아기...... 그 모든 것들을 위해 강민우는 맹렬하게 살아왔던 셈이다. 그러나 이제 한발, 한발 그러한 평온을 향해 다져나가던 자신의 자그마한 성 앞에 도저히 마주설 기력조차 없는 커다란 산 같은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강사범은 그 불빛 밑 담장에 등허리를 기대고 소주병을 땄다. 시멘트 벽은 흠뻑 쏟아졌던 비 때문에 강사범의 등허리에 축축한 습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불빛 밑에서 이홉들이 소주병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찰랑 흔들리고 있었다. ......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독하게 한잔씩...... 소주에서 다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강사범은 앉아서 소주 한 병을 다 비워 냈다. 그렇게 술기운이라도 빌지 않고서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 상미 아버지가 자신에게 던졌던 그 날카로운 말들이 온몸을 발기발기 찢어 놓을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사범은 생각하고 있었다. 상미 아버지가 자신에게 던졌던 그 모욕적인 말들은 세월이 지나서 그 날이 조금씩 무디어지기는 할지라도 영원히 몸 밖으로 흘러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마치 튼튼한 근육 어디엔가 박힌 총알이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 온몸의 근육조직 속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처럼 그 말도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평생을 자신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강민우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슨 노래를 자신이 흥얼거리고 있는지 똑똑히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사범은 뜻없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자 조그만 방의 창문이 열렸다. "아이 깜짝이야. 자기 아니예요? 왜 거기 앉아 있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 그래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를 해야 해. "아빠 만났어요?" 아마, 상미도 하루종일 그 말을 물어보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만났어......" "그래, 어떻게 얘기가 잘 됐어요?" 무릎걸음으로 바짝 다가오면서 상미가 다급하게 물었다. "잘 됐어......" 강사범은 간신히 그렇게 대답했다. 이 아이...... 이 여자의 맑은 눈 앞에서 어떻게 주먹보다 비정한 진실을 말해 줄 수가 있겠는가...... "몹시 야단 맞지는 않았어요?" "아냐, 용감하게 쳐들어가 가지고는 당당하게 말했지...... 난 당신 따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방해를 한다고 하더라도 난 결국은 그녀와 같이 살 겁니다. 그러니 제발 우리 상미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안 그러면 우리둘이 꼭 껴안고 한강물에 풍덩 빠져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했지...... 그랬더니 아무쪼록 우리 딸을 잘 부탁한다는 식으로 나오시지 않겠어. 그래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서 이렇게 한잔 마셨다구...... 알았지? 어때 내가 얼마나 용감한지 알았지?" "그래요, 잘 했어요. 내 딸을 잘 부탁한다고 하는 말까지는 하시지 않으셨겠지만 어쨌든 문전에서 쫓겨나지는 않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좋은 성과를 얻은 셈이에요. 일단 첫 번째 인사가 그 정도로 부드럽게 나왔다면 이제 멀지 않아서 아빠의 마음도 돌아서실 거예요. 이럴 때 엄마라도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상미가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몇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라도 있었으면 이럴 때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고 말이다. 엄마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자식이 딸이라면 역시 딸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도 엄마일 테니까. "그럼 이제 제가 내일쯤 아빠를 만나서 용서를 빌어야 할 차례군요. 사실 그동안 아빠 마음 아프시게 해드린 걸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빠에게 달려가서 용서를 빌고 싶어요." "그래, 내 생각에도 그러는게 좋을 거 같아. 내일쯤 아빠한테 한번 가 보라구......" "그럴께요, 참 저녁은 어떡했어요?" "응, 생각없어......" 그렇게 말하면서 강사범은 상미를 덥석 끌어 안았다. 아이...... 술냄새...... 하면서도 상미는 강사범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왔다. 아...... 상미...... 내 사랑......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심판의 날을 맞아 흔들리기 시작하는 구나...... 그런 절망감이 강사범의 전신을 휩싸들자 그는 격렬하게 상미의 몸을 부둥켜 안았다. 한 겹, 한 겹씩 상미의 속살이 드러났다. 봄날의 그 수양버드나무 연한 가지의 껍질을 벗기고 나면 거기 뽀얀 속살이 드러나듯이 상미의 하얀 몸이 환한 불빛속에 드러났다. "불을 끄세요." 눈을 감고 강사범에게 몸을 맡긴 채 상미가 그렇게 말했다. 강사범은 그러한 상미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그녀의 마지막 옷까지 벗겨 내렸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는 처녀...... 손톱으로 조금 건드리기만 하면 탕 터져 버릴 것 같은 그녀의 앞가슴. 그러면서도 우연히 낚시바늘에 달려나온 피라미처럼 신선하고 애처로운 느낌을 동시에 갖게 하는 그녀의 쭉 뻗은 다리...... 이 여자를 나는 다시 품어보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오늘이 이 여자와의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른다. "상미 일어서 봐......" "이렇게 그냥 일어서요?" "그래, 내가 잊어먹지 않도록 너의 모든 것을 똑똑히 보여줘...... 그래서 내가 눈을 감고 있어도 언제나 똑똑하게 상미가 생각날 수 있도록......" "싫어요, 불을 끄면 몰라도......" "아냐, 환한 데서 보고 싶어...... 지금도 나에게는 너무 어두운걸...... 너무나 세상이 어두어...... 그러니까 그냥." 상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머리를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사진기 앞에 선 모델처럼 강사범의 앞에 섰다. 그 눈부심...... 그 아름다움...... 그녀의 몸은 비록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지만 추한 욕정의 늪은 그녀의 몸 어느 구석에도 보이지 않았다. 깎은 대리석처럼...... 아니 잘 다듬어진 조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녀의 벗은 봄이 한 장의 그림이 되어서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스르르 물처럼 벽에 스며들것 같았다. 강사범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앞에서부터 그녀를 꼭 껴안았다. "이대로 우리 돌이 되자." "돌은 싫어요." "이대로 돌이 되면 아무도 우리를 떼어놓지는 못할거야." "전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래, 상미." "이제 그만 누워요, 우리." 번쩍, 강사범은 상미의 몸을 들어 올려서 이불 위에 올려 놓았다. 야단스러운 꽃부늬가 새겨진 이불 위에서 수줍은 듯이 웃고 있는 상미, 그녀는 민우에게 있어서 꽃의 전부...... 생의 전부였다. 아! 민우의 손길이 그녀의 온몸에 땀구멍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을 듯이 쓰다듬어 들어가자 그녀는 꿈틀거렸다. 이윽고 그들은 서서히 한덩어리가 되어갔다. 천장에 매달린 불빛만이 그들을 볼 수가 있었다. 강민우는 그 날 밤새 처절한 기분으로 그녀의 몸안에 있었다. 지칠 때까지...... 온몸의 뼈마디에서 노고지리 울음소리가 날 때까지 민우는 여자의 모든 것을 하나씩 세밀하게 입으로 확인했다. 마치 뜨거운 햇빛 아래 놔두면 녹아버릴 것 같은 아이스크림을 쥔 소년처럼...... 기운을 조금 빼서 손가락을 풀어 놓으면 금방 휘하니 날아가 버릴 참새 한 마리를 손에 쥔 아이처럼 강사범은 그녀를 놓지 않았다. 아침이 왔다. 무우 사려...... 배추 사려...... 하는 리어카 장삿군들의 목쉰 소리가 쩡쩡하게 산동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떡할까요?" "뭘?" "아이, 어제 저녁에 제가 얘기했었잖아요, 오늘이라두 아빠한테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싶다구 말이에요......" "물론 그래야지......" "그런데 막상 혼자 가려구 하니까 용기가 나지 않아요. 같이 가줄래요?" "상미가 아빠한테 나타나지 않으면 일이 더욱 어려워지겠지?" "그야 다시 말하면 잔소리죠. 어제 자기가 우리 아빠하구 인터뷰한 것도 잘 됐다니까 하루라도 제가 빨리 아빠를 만나서 어떻게 용서를 빌구 또 우리 앞날의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 아주 맞는 말이야...... 그나저나 나두 취직자리를 좀 알아봐야 할 테니까 다음번에 아빠를 만날 때 같이 가더라두 오늘은 혼자 가봐......" "정말 어제 아빠하구 얘기가 잘된 건 사실이죠?" 강사범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럼 우리 일단 같이 나가요. 자기는 취직자리 알아보구 난 아빠한테 다녀올께요......" 둘은 나란히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오자 교문 안에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그 동네 전체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요샌 어디든지 저렇군......" "학교 친구들도 좀 만나보고 싶어요...... 어쩐지 대학이라든가...... 또는 친구들의 일이 저에게는 아주 아련하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건 웬일이죠?" "글쎄......" "아니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요. 그까짓 취직 안 된다구 밥 굶겠어요?" "상미두 밥 굶어봤어?" "그럼요, 설악산에 놀러 갔다가...... 음...... 거기가 어디더라, 하여간 무슨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었는데 버너가 고장이 나 가지구 굶어봤어요......" 강사범은 더 이상 그 화제를 끌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놀러가서...... 바캉스 가서 버너가 작동을 하지 않아서 굶어본 것도 굶어본 것인가...... "저는 버스 탈 거예요, 자기는?" "상미야......" 강사범은 상미의 손을 꼭 잡았다. 날아가지 마. 날아가지마...... 돌아와야 해...... 꼭 돌아와야 해...... 강사범은 그렇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왜요? 내가 아빠한테 갔다가 다시 못올 것 같아서 불안해요?" 강사범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상미가 물었다. "아냐, 못 오기는...... 거기서 버스 한번 타면 여기 오는데 뭐......" "그럼요, 택시타면 십분도 안 걸리는 거리예요. 그럼 저 다녀 오겠어요." 상미가 버스에 오르자 불불거리면서 불평을 하고 있던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사범은 차 안에서 자신을 내다보는 상미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버스 안에서 상미도 강사범을 보며 손가락을 움직여보였다. 이렇게 헤어지는 걸까? 우리의 사랑, 우리의 미래, 우리의 비밀이 오늘 이것으로 간단하게 끝나버리는 것일까? 아냐, 한 번쯤의 기회는 더 있을 거야. 아니 어쩌면 상미가 아빠를 훌륭하게 설득해 낼지도 몰라. 여자답지 않게 성격이 강하고 깡이 있는 애니까. 저희 아빠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올지 몰라.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어, 내가 따라가는 건데...... 따또야...... 그냥 이렇게 내가 그녀를 무력하게 보내야 하는 거니? 멀어져 가는 버스 뒤꽁무니를 보면서 강사범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상미는 밤 열시가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린다는 일......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를 막연하게 누군가를 기다려 보지 않고서는 잘 알 수가 없는 법이다. 더군다나 당연히 꼭, 틀림없이, 확실하게 돌아올 사람이 아니라면 그 기다림이야말로 온몸에서 어디론가 피가 새어나가고 있는 듯한 그런 괴로움인 줄을 강사범은 그제서야 알 수가 있었다. 상미야...... 제발...... 나에게로 돌아와...... 아무런 이유도 달지 말고서 그냥 네 환한 얼굴을 다시 내 앞에 보여주기만 해다오. 상미. 그녀가 없는 방은 그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빈 방 바로 그것이었다. 그 텅빈 방에 웅크리고 앉아서 불도 켜지 않은 채 강사범은 상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피워댄 담배연기 때문에 방안이 몹시 답답했다. 마치 깔깔하게...... 그리고 진하게 젖어들고 있는 자신의 마음처럼 방안이 답답했다. 짤깍거리는 시계소리가 그 빈 방에 가득한 어둠을 짤깍짤깍 토막내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시계바늘이 너무 무정하게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그 시계바늘에 감자알 만한 돌멩이 하나가 매달려서 있는 대로 늑장을 피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상미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의 그 시계바늘은 아주 빠르게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었고, 상미가 돌아온다는 느낌에서의 그 시계바늘은 온갖 핑계와 불평들을 가득담고 밍기적거리고 있었다. 강사범은 다시 담배 한 대를 피워물고 그 시계를 노려보았다. 밤 열 시. 두 개의 시계바늘이 푸른 인광을 번쩍이면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민우는 망연히 그 시계바늘을 바라보고 있자니까 온몸이 조금씩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싸움을 하다가 유치장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가 들어간 유치장에는 다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강민우 혼자서 마름모꼴의 유치장에 달랑 혼자 앉아 있었는데 간수가 있는 유치장 가운데에 큰 쾌종시계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시계바늘이 오분...... 십분씩 흘러가는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군대에서 신병훈련이 삼일쯤 남았을 때였다. 이제 훈련이 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훈병들이 해이해지자 조교가 말했다. 그래...... 너희들 이제 꼭 삼일밖에 남지 않았다구 개판 오분전으로 나가겠다 이거지...... 좋았어...... 그러면 내가 지금부터 이 마지막 삼일을 삼 년처럼 만들어 주지...... 집합, 빤스 바람에 알철모, 완전군장에 소총 입에 물고 연병장에 집합...... 대가리 박아...... 한강철교...... 어때? 삼십분이 석 달쯤 되는 것 같지...... 강민우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막 뛰어서 공중전화 박스로 갔다. 딸깍, 여보세요...... 거기 상미양 집이죠...... 지금 있습니까...... 없어요...... 전화하지 마세요...... 없습니다. 저녁 일곱 시까지는 그래도 행여나 하는 생각에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던 강민우였다. 설마 다 큰 딸을 포승줄로 꽁꽁 묶어서 굴비처럼 벽에 걸어놓지는 못할 테지...... 아무렴, 걔가 어떤 애라구...... 틀림없이 돌아올꺼야. 암 돌아오고 말구...... 아냐, 상미 아빠의 그 불 같은 성격으로 봐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상미를 꼼짝 못하게 가두어 뒀는지 몰라...... 언젠가 우리집에 나타났던 그 우락부락한 청년들을 시켜서 어느 으슥한 산장에 가두어 두었는지 몰라.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그런 불길한 생각 때문에 강민우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만 그녀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전화를 했었다. 없어요, 전화하지 마세요, 없습니다. 그리고 딸깍, 전화기의 저쪽 상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다. 차라리 상미 아빠가 그 전화기에 나타나서 저번처럼 칼날 같은 욕이라도 퍼부어 주었으면 싶었다. 강사범은 다시 십원짜리 동전 한 개를 전화기에 넣으려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전화에서 녹음기처럼 또 똑같은 소리만 나올 텐데...... 그때였다. 어디선가 <와!>하는 함성이 들리고 있었다. 처음에 들리는 소리는 마치 환영처럼 한번 천지를 들썩 가볍게 들었다 놓은 것 같았다. 무슨 소릴까?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까 그 함성이 버스종점 근처...... 그러니까 대학 근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와! 와!...... 단순한 그 소리는 마치 한여름 밤 논바닥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들의 극성스러운 울음소리처럼 두서없는 것이었으나 강민우가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일정한 리듬을 타면서 그 소리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데모였다. 혹시...... 저 데모 때문에 상미가 길이 막혀서 돌아오지 못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강사범은 쏜살같이 언덕길을 달려 내려갔다. 허겁지겁 종점 근처에까지 뛰어내려와 봤으나 데모 때문에 길이 막힌 상황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그냥 학교 안에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하고...... 그렇게 웅성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밤 열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학교 앞의 가게들은 모두 셔터 문을 내리고 있었다. 도장은 어떻게 하고 있나 싶어서 그 쪽으로 슬슬 올라가려는데 누군가가 강형! 강형! 하고 불렀다. "어, 서대동......" "강형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유?" "나 도장 그만둔 거 몰랐어?" "글쎄 그거야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일입니까? 갑자기 도장을 그만두다니 무슨 좋은 일이라두 생겼수?" "좋은 일이 생겨가지구 그만 뒀다면 얼마나 좋겠어. 뭘 그렇게 한아름 사가지구 가는 거지?" "빵하구 음료수예요, 우리 친구들 갖다줄려구요. 그런데 형 얼굴이 영 형편 없습니다. 무슨 고민거리라두 있어요?" "아냐, 가봐...... 요새 바쁘겠군."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만나요." 서대동은 그렇게 말하더니 빵이며 음료수를 가슴에 가득안고 학교 쪽으로 올라갔다. 강사범은 가슴이 답답해서 천천히 따또네 토굴 쪽으로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맞아. 서대동도 그렇고 전상미도 그렇게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야.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자격,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인간의 자격, 혼자 있지 않음을 설명하는 저 소리들,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 따또는 토굴처럼 생긴 그 지하실에 혼자 있었다. "왜? 오늘은 장사 나가지 않았어?" "오늘 같은 날 잘못 나갔다가 정말 길거리에서 자는 수가 생길 것 같아 그냥 집에 있었어, 그래 잘 됐어?" "아침에 집에 갔다 오겠다구 나갔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걸......" 고개를 수그리고 강민우는 그렇게 말했다. "너 같으면 다시 너에게로 돌려 보내겠니?" 날카로운 어조로 따또가 물었다. 정말 내가 상미 아빠라면 어떻게 할까. 다 큰 딸이니까 네 인생 네가 알아서 개척해라 하고 상대가 고아든 거지든간에 흔쾌히 허락을 할 수가 있을까, 아니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딸을 설득하려고 들까. "아무래도 쉽게 돌려보내지는 않겠지......" "그래, 문제는 바로 그거야. 나 같아도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생각을 해도 쉽게 돌려보내지는 않을 꺼야." "내가 잘못한 걸까?" "뭘?" "난 그녀한테 그렇게 말했거든. 자기네 아버지하고 아주 얘기가 잘 됐다구 말이야.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먹구서 아빠를 만나보구 돌아오라구 말이야." "그건 네가 잘한 거야." "정말 잘한 일일까?" "마음이 아프겠지만 어떡허니...... 우리들은 그런 걸 이미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대로 헤어질순 없어...... 이렇게 헤어질순 없다구......" 그 지하실이 쩡쩡 울려나가도록 강사범은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내지른 소리가 웅웅 하는 메아리가 되어서 그의 귓가에 되돌아들고 있었다. "여길 왜 왔니?" 따또가 물끄러미 강사범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따또야...... 우리 이 서울을 떠나자...... 여긴 사람들이 너무 많지 않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자꾸 우리 같은 놈들을 외롭게 만들지 않니?" "어디루? 떠난다구? 어디루?" "아무데나......" "아무데나 떠난다구 그 여자의 그림자가 네 몸속에서 떨어져 나가겠니? 그리고 아직은 떠날때가 아니야." "왜?" "집에 가서 기다려봐......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보라구...... 며칠이구 기다려 보란 말이야...... 그런 다음에 이 서울을 떠나든지 어쩌든지 해두 늦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허지?" "모르지......" 그렇다. 강사범은 벌떡 일어나서 다시 산동네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오늘도 가지 않았다. 아직 열 두 시도 되지 않았다. 이틀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훌쩍 여길 떠나버린다면...... 그녀 상미가 아무도 없는 빈 방에 나타나서는 어떤 마음일까...... 그래......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내가 돌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기다리자. 강민우는 그 하루를 그냥 보냈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 가을의 풍성함을 생각하면서 소주로 목을 조금씩 축이면서 하루를 기다렸다. 빈 방에서 민우는 이틀을 보냈다. 그녀와 처음 가졌던 그 겨울의 매운 바람 속에서의 따뜻했던 말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다음날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나흘을 그는 기다렸다. 빡빡한 목구멍으로 딱딱한 건빵을 밀어넣으면서 그녀가 목련처럼 환한 웃음을 가지고 활짝 방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면서 나흘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그는 결연하게 일어섰다. 앉아서 기다릴 수 만은 없었다. 찾아내야지 내 사랑을...... 저들로부터...... 저들의 견고하고 딱딱한 마의 늪으로부터 그녀를 빼내야지...... 전화는 언제나 같은 소리만 했다. "상미 없어요. 전화하지 마세요." 강민우는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상미네의 그 커다란 빌딩 앞에 서 있었다. 차가운 결의 때문에 그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쓰윽 쓰윽, 엘리베이터는 한꺼번에 이 땅위로부터 강민우의 몸을 오층씩의 허공에 올려놓고 있었다. 변호사가 강민우를 보고 웃었다. "상미를 보게 해 주십시오......" "왜요?" 변호사가 비웃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제발...... 상미를......" 눈물을 떨구면서 강사범은 그렇게 애원했다. 무릎을 꿇으라면...... 아니 내 손가락 하나를 자르라면...... 아니 내 머리칼을 몽땅 뽑으라면...... 아니 내 배를 가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상미를...... 변호사가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 재수생이나 대학생들이 아리송한 시험문제를 앞에 놓고 팔랑개비를 돌리듯이 변호사가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 그 앞에서 강민우는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뱀, 방울뱀의 눈, 상어의 그 무표정한 회색눈...... 강사범은 그 변호사의 작은 눈이 그렇게 무표정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안 됐군...... 강사범......" 손가락 사이에서 휘릭휘릭 볼펜을 돌리던 손장난을 멈추고 달깍달깍 볼펜 꼭지를 누르면서 변호사가 말했다. "제발......" 강민우는 결국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상미를 보게 해 주십시오." 그 마지막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면서, 강민우는 자신의 몸이 난장이처럼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아주 자그만 벌레가 되어서 레이저 광선처럼 강한 햇빛 아래에서 몸을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자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려 봐도 도저히 그 햇빛을 피해나갈 수 없는 듯한 절망. 온 몸이 그 햇빛 속에서 해삼처럼 스물스물 녹아버릴 것 같은 나약한 절망감. "그러니까 자네는 아직 상미양의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모양이로구먼......" 변호사가 담배를 피워물면서 천천히 그렇게 말했다. "네, 그 근처만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지던 겨울 밤에 스키장의 길처럼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언덕밑에까지 그녀를 바래다준 적이 있을 뿐이었다. 변호사가 푸푸 웃고 있었다. 비웃음과 실소, 그리고 약간의 허망스러움이 그 웃음 끝에서 푸실푸실 떨어지고 있었다. "한 가지만 약속하게......" "네......" "마지막으로 잠깐만 보겠다고...... 얼굴만 잠깐 보겠단 말이야......" "약속하겠습니다." 어떤 약속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한번, 단 일초라도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낮달 같은 환한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팔에 불쑥불쑥 솟아나온 핏줄이라도 그의 앞에 뽑아내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가지......" 변호사가 앞장을 섰다. 차를 탔다. 간다, 상미에게로...... "회장님은...... 만일에 회장님이 이 일을 아시면 노발대발 하실는지도 몰라...... 그러나 자네가 나를 뱀처럼 볼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경우에는 잠시 잠깐이라도 서로의 얼굴을 보고 헤어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그래 참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드는구먼...... 그건 어쩌면 자네를 위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 회장님의 외동딸인 상미양에게 이런 일에 관해서 내가 마지막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그러니 얼굴만 잠시 볼 수 있도록 해줌세......" 변호사가 그런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말들이 반쯤 밖에는 강사범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사범의 마음은 미지의 지하실...... 그 어둡고, 축축하고, 무엇이 웅크리고 있다가 발목을 덥석 물고 늘어질지도 모르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지하실의 첫계단을 이제 막 내딛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공포도 아니었고, 설렘도 아니었으며...... 아, 간단히 말해서 그건 하나의 분홍빚 절망이었다. 문이 열렸다. 차가 통째로 그 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운동장 같은 정원에는 한강가에 서 있는 것 같은 수은등이 몇 개 서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사못처럼 틀어져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거기 이층의 테라스에는 팥죽색의 등나무 꽃들이 강한 향기를 내뿜으면서 튀긴 밥알들처럼 잔뜩 매달려 있었고 그 밑에 상미 그녀가 흰옷을 입고 이젤 위에 자그마한 캔버스를 앞에 하고 앉아 있었다. "상미......" 강사범은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그렇게 그녀를 불렀다. 언뜻 상미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 민우씨......" 그녀는 그렇게 강사범을 부르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그녀가 들고 있던 붓이 캔버스에 떨어져 딸국 검은 점 하나를 그녀가 그리고 있던 그림 위에 남겨 놓았다. "민우씨......" "별일 없었어?" "네......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강사범이 이젤 위에 받혀져 있는 캔버스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억장이 막혀 목이 꽉 메어왔지만 강사범은 태연하게...... 마치 하루 일을 끝내고 그 산꼭대기의 작은 방으로 돌아가, 별일 없었어, 하고 묻는 분위기로 그렇게 말했다. "응, 자기 얼굴 잊어버릴까 봐 그리고 있었어......" 상미가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미소를 띠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상미의 커다란 손을 잡으면서 강사범은 캔버스 위에 그려지고 있던 그림을 바라보았다. 네모번듯한 턱이 유난스럽게 각진 사각형으로 그려졌지만 그 그림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모습은 바로 자신이었다. "내가 저렇게 접은 종이처럼 생겼어?" 강사범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묻자...... "내 솜씨가 그것뿐인 걸 어떡해......" 후둑후둑 눈물을 떨구면서 상미가 그렇게 대답했다...... "울지마 맹꽁아......" 강사범은 그렇게 부드러운 소리로 말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가슴이 쿡쿡 저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결에서 나고 있는 샴푸냄새...... 가슴에 닿아오는 그녀의 가녀린 숨결. 아, 이여자는 나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하나의 푸른 물결...... 하나의 안개...... 다시 하나의 파도, 그리고 가슴저린 슬픔. 그리고 내 사랑. 낙엽이 구르는 긴 계단아래에서 흩날리고 있던 그녀의 머리결. 엷은 밤색 바바리...... 작은 주머니에서 하나가 되곤 하던 맞잡은 손. "왜 거짓말 했어요?" 언뜻 상미가 고개를 쳐들고 그렇게 물었다. "뭘?" 강사범은 아주 평범하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강사범은 그녀와 그 자리에서 그렇게 쓸쓸하게 헤어져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라도 그녀에게 추하게 우는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도 그래 나보다도 그녀가 여기서 나를 보내 버리고 말면 성긴 눈발이 풋풋하게 흩날리는 새벽녘의 플랫폼에서 내가 떠나간 기차를 보고 허한 가슴을 달래면서 뒤돌아서야 하는 그녀가 있으니까. "왜, 아빠를 만나서 얘기가 잘 됐다고 거짓말을 했느냐구요......" 그렇게 말하는 상미의 얼굴 표정도 단순한 원망만 있지는 않았다. 누구보다도 자세히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녀 자신이 왜 강사범이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둘러대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강사범은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어떡할 거니......" 강사범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실, 그 말에 상미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강사범은 그렇게라도 그녀의 마음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날 여기서 데려가요." 상미가 강사범의 목줄기를 두 손안으로 싸안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여자야...... 상미야...... 강사범은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보면서 속으로 말했다. 내가 널 어디로 데리고 갈 수가 있다는 거니...... 산꼭대기의 작은 방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미 저 높은 공중에서 우리를 향해서 날카로운 주둥이와 발톱을 갈아세우면서 빙빙돌고 있는 매서운 눈을 가진 독수리에게 들켜버린 작은 멧새의 둥지에 불과하다는 걸 너도 잘 알 수가 있지 않니......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절망하고 있는 거 아니겠니...... 우리가 우리 둘이의 날개를 아무리 퍼덕거려서 멀리 날아 도망한다고 하더라도...... 한나절...... 아니 삼사일을 힘껏 도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 독수리로서 볼 때는 단지 단 한번 날개를 휘젓는 거리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너도 잘 알고 있는 거 아니니...... "아빠는 날 아주 멀리 보내버릴 거예요. 불란서나 미국쯤...... 아니 그보다도 더 멀리 아프리카쯤...... 그러니 어서 날 데려가요." 상미가 다시 그렇게 말했다. "난 며칠이나 그 작은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갈 수가 없었어요." "잘 알아, 올 수가 없었다는 걸...... 그러면서도 난 너를 기다렸지." "그러니까 날 데려가요, 당신은 튼튼하잖아요." 상미가 덕지덕지 굳은 살이 박혀 있는 강사범의 주먹을 어루만지면서 그렇게 말했다. 강사범은 그런 상미의 말에 쓰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상미를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 상미가 나에게로 다시 올 수가 없었다거나 내가 여기 상미 있는 데까지 쳐들어 올 수가 없었던 것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어, 상미가 여기 이층에서 뛰어 내릴 힘이 없어서 나에게로 오지 않았을까? 여기 이층까지 타고 내려올 밧줄이 없어서 나에게로 오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여기 상미가 있는 집 주소를 알아내지 못해서...... 이 집의 담장을 뛰어넘지 못해서...... 이 집에서 기르고 있는 살찐 불독이 무서워서......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어깨 딱 벌어진 주먹들이 무서워서 여기까지 오지 못한 줄 알아...... 아니잖니......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니? 그래...... 우린...... 난 여태 꿈을 꾸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지금도 꿈을 꾸고 있어...... 너를 다시 만나면 너를 다시 데려갈 수 있는 어떤 길이 생기리라는 그런 막연한 꿈을 꾸고 있었어...... 너를 업고, 여기 이집의 담을 뛰쳐 넘어가서 사막이 있는 이 세상 끝까지 너를 업고 도망치리라는 생각을 했었지. 그러나 우리가 헤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 하나만은 꿈이 아닌 것 같아...... 그것 하나만은 꿈이 될 수가 없어...... 그 이전이나 그 다음은 꿈을 꿀 수가 있는데 말이야...... 상미는 그냥 쿨쩍쿨쩍 울기만 했다. "상미야......" "날 데려가요...... 날 데려가요...... 데리구 여기서 나가자구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털썩 주저앉아서 상미는 그렇게 떼를 쓰기 시작했다. 강사범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끝, 그 마지막에는 무엇이 있는가? 수염 길다랗게 달린 신이 있는가...... 지구라는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쏘아올린 우주선 몇개가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별이 되어 떠돌고 있을까...... 그 허망의 끝 어디에선가 비를 내리고, 이 세상에 안개의 늪을 드리우고, 또 가끔은 백년묵은 나무의 뿌리까지 벌렁 드러눕게 만드는 바람을 몰고오는 하나님이 앉아 있는 것일까...... 변호사가 왔다. "자, 이제 가십시다." 면회 끝, 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간수를 바라보듯이 강사범은 멍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에게...... 상미에게 이제 안전하게 울 안에 가두어둔 재벌 딸에게 선임 변호사로서 선심을 쓰고 인심을 얻고, 아부를 하고자 하는 이 변호사에게 내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매달리면 상미 그녀와 함께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을...... 같이 식사 한 끼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같이 이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시간을 더 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다면...... 해서...... 때문에...... 그러므로...... 무엇이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걸레처럼 젖고 찢어진 내 영혼이...... 상처받고 물어뜯긴 내 자존심이...... 낙동강 오리알처럼 이 세상에서 때뭍은 개처럼 살아가는 천애고아인 내 신분이...... 산꼭대기의 그 작은 방이...... 무엇이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강사범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날 데려가...... 이 못난이 강자기...... 도자기야...... 날 데리고 도망가란 말야...... 날 데려가라구...... 이 못난이야...... 상미가 울음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변호사의 팔에 매달려서 상미는 그렇게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흔들린다, 흔들려. 이 세상 여기저기 내 발 밑마다 흔들린다, 흔들려. 다시 힘주어 보아도, 서러운 사랑. 한잔 술을 마셔도 언제나 흔들리는 것은 마음뿐...... 여기저기 모두 다 내 눈에 드는 모든 것은 흔들린다, 흔들려. 강사범은 허청허청 따또가 살고 있는 토굴이 있는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가면서 길거리에 있는 술집마다 들러 꼭 한잔씩의 술을 마시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취한 몸으로 강사범은 휘청거리면서 따또가 웅크리고 있는 지하실 토굴 앞에 이르렀다. 따또가 엉기적엉기적 그 지하실에서 기어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 가냐?" 강사범이 그렇게 묻자, 따또는 대답 대신 밍기적거리면서 강사범에게 등을 돌려보였다. --한 장에 백 원-- 비 오는 날, 상미의 아빠를 만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아빠를 만나서 따뜻한 말 대신...... 서로의 마음속을 터놓는 대신...... 참담한 슬픔만을...... 허약한 골기퍼가 강한 축구공을 가슴에 겨우 받아안고서 뒤로 벌렁 넘어지듯이...... 그렇게 철철 피흘리는 가슴으로 걸어오던 강가에서 같이 고아원을 도망쳐 나왔던 따또의 등에 푯말처럼 걸려 있던...... 한 장에 백 원짜리 걸레...... "나에게 업혀라 따또......" "너 취했구나......" "얌마, 취하지 않고서 이렇게 걸레 같은 서울을 떠날 수가 있니?" 강사범이 그렇게 말하자 앉은뱅이 따또가 잠시 멍하니 강사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늘과......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지는 거리...... 어느 골목골목을 둘러보아도 희망과 앞날이라는 문제는 까맣게 찌들어서 썩은 팥알들에서처럼 흰 날벌레들을 풀풀 피워내고 있을 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 어디로 갈 거니......" 조용하게 따또가 그렇게 물었다. "나에게 업혀라, 우리 다시 한번 도망을 가야 해...... 여기서 더 무엇을 찾을 수가 있겠니...... 이 비정한 도시에서 말이야......" 강사범은 몸을 구부려서 따또의 등에 푯말처럼 걸려 있던 <한 장에 백 원>이라는 푯말을 벗겨서 자신의 목에 걸었다. "어서 가자니까......" "지금 이대로 떠나자는 거니?" "그럼 언제는 우리가 어디 가면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라도 할 데가 있었다는 듯한 말투구나......" "조금 기다려라, 간단하게 가방이라도 챙기게......" 강사범은 다시 밍기적밍기적거리면서 지하실의 토굴 안으로 들어가는 따또를 쳐다보면서 전신주를 몸에 딱 붙이고 기대앉았다. 옛날, 어린시절에 고아원 앞에 있는 전신주는 기차길에 깔린 침목처럼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래도 거기 귀를 가까이 대고 있으면 얼굴에 따뜻한 느낌이 드는 나무였다. 간혹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거기 그렇게 나무 전신주에 귀를 딱 붙이고 있으면 우룽우룽하는 바람소리가 마치 전화선을 타고 전해지는 낯선 사람의 목소리처럼 귀안을 간질거리곤 했었던 것이다. 상미야 내 말을 듣고 있니...... 딱딱한...... 그리고 싸늘한 시멘트 전신주에다가 귀를 바짝 가까이 갖다대고 강사범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네가 마지막이야...... 이제 내가 다시 서럽게 사랑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난 너를 잊을 수가 없을 거야...... 아니 그리고 난 이제 다시는 결국 그 끝에는 싸늘한 뱀 같은 비극이 또아리를 틀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랑은 하지 않을 거야...... 너도 알거야...... 지금처럼 내 마음이 딱딱하고 싸늘한 시멘트 전신주를 타고 올라가 네 따뜻한 가슴에 전하고 있는 말을 가만히 허공에다가 귀 기울이고 있으면 천천히 들을 수 있을 거야...... 나도 이제는 사랑 같은 헛된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어...... 그러는 것이 내가 슬퍼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야...... 잠시 후에 따또는 까만 가방 하나를 들고 다시 앉은뱅이 걸음으로 강사범 앞에 나타났다. "그게 전부냐?" "그래두 꽤 많지 않니? 우리가 그 비 오는 날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올 때는 빈손이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재산이 있는 거 아니냐?" "재산이라구?" 허허, 재산이라구...... 강사범은 키들키들 웃었다. 재산이라는 말이 그렇게 웃기게 들릴 수가 없었다. "너는 아무것도 없냐?" 재산이라는 말을 해놓고도 우스웠던지 따또가 그렇게 말했다. "잔소리 말고 업혀라!" 번쩍, 강사범은 따또를 업었다. 흔들흔들 발 밑이 취한 때문인지 흔들리고 있었다. "나가자 씩씩하게 대한 소년아...... 태극기 높이 들고 앞장을 서서...... 우리는 싸우는 대한의 어린이...... 무찌르고 말테야 공산 오랑캐......" 한 장에 오백 원이라는 푯말을 목에 걸고서 강사범은 따또를 등에 업은 채 그렇게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면서 상미와 살고 있던 산동네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도망간다면서 어디로 가는 거냐?" "나도 너처럼 내 재산을 챙겨가지고 가야지...... 그러고 보니까 네 말마따나 우리는 재벌이다, 얼마나 재벌이니, 내가 상미와 살고 있는 전세방 값을 빼면 말이야...... 대학생들에게 빌린 돈을 빼고도 우리 식으로 살면 석달 열흘은 굶지 않고 먹을 돈이 될거야...... 고아원에서 맹물로 배를 채우던 생각을 하면...... 맹물을 먹다먹다가 그게 싱거워서 된장을 조금 풀어서 맹물을 먹던 생각을 하면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재벌이냐...... 얼마나 부자냐...... 나가자 씩식하게 대한 소년아......" 그렇게 버럭버럭 노래를 부르면서 올라가는 강사범의 눈에는 하나의 환영이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넓은 운동장에서 청군 백군으로 짝을 나누어서 기마전을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면서 앞에서 다가오는 일렬로 늘어선 적군의 대열...... 하나씩 맞붙어서 있는 대로 용을 쓰다가 기진해서 떨어지는 아이들, 검은 어둠을 불빛처럼 환하게 밝히고 있다가 빗줄기에 떨어지는 벚꽃의 꽃잎들, 거기 낮달처럼 환하게 떠오르는 상미의 얼굴. 휘청휘청 흔들흔들 강사범은 따또를 업고 산동네를 올라 상미와 살고 있던 작은 방으로 찾아들었다. 텅 빈 방. 며칠 동안 웅크리고 앉아서 상미를 기다리면서 피워댄 담배꽁초가 어디선가 다시 푸르스름한 연기를 피워올릴 것 같은 그 방. "여기가 내가 그 여자와 살고 있던 쥐구멍이야......" "쥐구멍이라니 얼마나 좋은 방이냐......" 따또가 방을...... 그 방안에 있는 풍경들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랬었지...... 저기다가는 냉장고를 놓고...... 또 저쪽에다가는 텔레비젼을 놓고...... 이쪽에다가는 우리 아기를 눕히고...... 그렇게 아기자기한 계획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니?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겨우 석유곤로 하고 전기밥솥 하나를 마련해 놓고서 이렇게 끝나버렸어...... 자, 이 사진을 봐라...... 이 애가 바로 그 여자야...... 얼마나 이쁘니? 파도처럼 시원하고...... 사슴처럼 미끈하고 낮달처럼 깨끗한 여자야......" 강사범은 주절주절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따또 앞에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민속촌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거기서 부드럽게 창호지로 바른 한식방 안에서의 그녀와의 키스는 얼마나 가슴저미는 날카로움으로 지금까지 내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일까...... "자식, 그래도 울지는 않는구나." 물끄러미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상미를 바라보다 말고 따또가 그렇게 말했다. "야, 벌써부터 사내가 징징 짜면 어떡허니 평생을 울며 살아야 할 판인데......" 어쩐 일인지...... 어째서 그렇게 탕탕 용감하고 굳센 소리만 나오는지 강사범은 자기 자신을 잘 알 수가 없었다. 상미네의 집에서 따또의 지하실까지 걸어오면서 거리에 있는 술집마다 들러서 딱 한잔씩의 술을 청했다. 세상에 바짝 매달려 있는 자신을 한 걸음 세상 밖으로...... 또는 일밀리쯤의 높이로 세상 위에 띄워놓는 그 술집에서도 웃으면서 한잔, 딱 한잔의 독한 술을 내주는 집이 있었고, 우리집은 잔술을 팔지 않아요, 하면서 얼음처럼 냉엄하게 고개를 돌리는 집들도 있었다. 술집이 허름하면 허름할수록, 유리 창문이 한두 쪽씩 깨져 있는 집일수록 말없이 한잔의 술을 팔았고, 단단하고 매끈하며 잘 정리된 집일수록 딱 한잔의 술을 파는 일에 인색했다. "신랑 안에 있수?" 주인집 아주머니였다. "네, 신부는 없고, 신랑은 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유? 새댁이 나가면서 잠시 친정집에 다녀 오겠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수?" "아니예요, 우린 처음부터 올봄까지만 같이 살기로 했거든요......" "아니 그게 정말이유? 그래 앞으로 어떡헐꺼유?" "아주머니 그러지 않아도 오늘 이 집에서 나갈 꺼예요, 제가 어디 가서 자리를 잡으면 연락을 드릴 테니까. 전세방 값이 빠지면 그리로 부쳐주실 수가 있겠죠?" "왜, 직장을 시골로 옮기게 됐수?" "도망을 가는 거예요." "망?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아주 큰 죄를 지었죠, 큰 성의 공주를 훔쳐 왔었으니까요, 그냥 사랑만 하고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공주를 훔쳐 왔었으니까요." 강사범은 주섬주섬 도복을 챙겼다. 태권도 육단 강민우. 그렇게 노란 수글씨로 새겨진 도복의 검은 끈을 질끈 동여매어 달랑 도복을 둘러메곤 강민우는 일어섰다. "아니 그 가슴에 단 건 뭐유?" --한 장에 백 원-- "이거요? 네...... 우리는 지금부터 걸레를 팔러 나서는 거예요, 세상이라는 더러운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낼 수 있는 걸레를 팔러 다니기로 했어요, 한 장에 백 원짜리를...... 자, 가자. 따또야......" 강사범은 따또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가지 말아요, 날 데리고 가요, 이 바보야 날 데리고 가란 말이야...... 상미의 그 쨍쨍한 음성이...... 그녀와 같이 몸을 섞었던 이불깃 가장자리에서...... 그녀와 흰 밥을 펐던 전기밥솥 언저리에서...... 똑딱똑딱 움직이는 벽시계에서...... 수돗가에서...... 날 데리고 가요, 이 바보야...... 날 데리고 여기서 나가잔 말이야...... 하는 그녀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사방에서 날아 나오고 있었다. 서울역.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갈까?" "큰 도시는 싫어......" "나두 그래......" "어디까지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으로 가지......" "어디루?" "우리 가면서 생각하자......" "옛날처럼 말이지?" "그래, 옛날처럼......" 강사범은 잠시 빨간 공중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소리가 들릴까? 그녀의 귓가에...... 그녀의 마음에 내 슬픔의 강물 위에서 흐르고 있는 저미는 서러움이 저 전화기를 들면 그녀의 귓가에 들릴 수 있을까? "한잔 마시구 싶어......" 따또가 아이스크림을 조르는 아이처럼 강사범의 등에 업혀서 그렇게 말했다. 강사범은 소주를 한 병 사서 그 병에 묻어 있는 먼지를 쓱쓱 바짓가랑이에다 문지른 다음 이빨로 뚜껑을 따 맹물처럼 꿀꺽꿀꺽 들이켰다. 고개를 들고 소주를 마시는 강사범의 얼굴 위에 뿌연 햇살이 미지근하게 머무르고 있었다.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독하게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죽은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는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얼키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수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김태준의 시 <흔들릴 때마다 한잔> 전문